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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May 06. 2019

함부로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지 말 것

어린이·청소년과 그 관련 직업에 대한 잘못된 편견


교사를 비롯하여, 교육·보육 관련 직업이나 청소년지도사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표현이 있다. "아이들/청소년들을 좋아해서/사랑해서" 이 일을 선택했고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다.(이때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딱히 엄밀하게 의미를 구분해서 쓰이는 말 같지는 않다.)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스스로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일을 하려면 청소년,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요건처럼 거론된다. 예를 들면 교사라면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하다.



취향과 감정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예컨대 나는 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개와 같이 있는 것이나 개를 돌보는 일이라면 비교적 즐겁게 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개의 생김새나 행동거지를 대체로 친숙하게 예쁘게 느낀다는 뜻이다. 내가 개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개들이라면 무조건 다 호감과 애정을 갖거나, 그 개들 하나하나를 알고 이해하고 싶거나, 또는 그 개가 나를 알고 이해해주길 바라거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거나, 헌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어떤 어린이·청소년 관련 일 종사자가 내가 개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들과 나이가 적은 사람들의 특성들이 친숙하고 즐겁게 느껴진다고 얘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취향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취향이 아닌 감정의 문제이다. 단지 표현의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어린이·청소년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나 무언가 훈훈하고 낭만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감정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단지 '아이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가 있나? 어린이·청소년 관련 일 종사자들이 만나는 청소년들은 보통 연간 수십 명, 수백 명에 이른다. 그만큼의 사람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당연히 서로 안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호감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관계를 맺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아이들, 혹은 자신이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일지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의심스럽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한다'라는 것이 정말 온전한 감정일지. '아이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상정한다면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주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직업적 위치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과연 진중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런 감정을 직업적 의무로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일지.


애정 표현의 권력


내가 '아이들을 사랑한다' 등의 이야기를 접할 때 연상되는 것은 '장애우'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란이다. 장애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친근감을 담겠다고 '벗 우(友)' 자를 넣어서 만든 말이지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부르는 말이라는 비판, 장애인이 다 친구냐는 비판 등이 제기된 바 있다. 아마 처음 만든 사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반자 관계라는 뜻을 담아 만든 말이었을 듯싶지만,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자의적으로 친구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힐 위험이 있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종종 일방적인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때 애정은 일방적이면서도 시혜적인 성질을 띤다. 가령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 친구"라는 말을 쓰곤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친구"의 뜻으로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를 등재해놓고 있다. 그러나 나이가 적은 사람,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없다. 호칭이 되었든 어느 정도의 스킨십이 되었든, 이러한 친근함의 표현은 '아랫사람'이 고마워해야 할 일이며 '윗사람'의 아량으로 여겨질 때가 잦다. 관계나 감정의 거리를 좁힐 권력도 사회에서는 불평등하게 주어지고 있다. 친근감이나 애정의 표현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경계심을 늦추는 경우도 많고 문제를 제기하기 더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처럼 '친구'라는 관념 속에도 불평등한 관계와 인식이 얼마든지 담길 수 있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 '학생들을 사랑하는 선생님' 같은 관념은 어떠한가? 이때의 사랑은 사람 대 사람 관계 속의 문제나 감정이 아니라, 더 우월한 사람이 미숙하고 열등한 사람에게 '베푸는' 모양새를 취하진 않나? 자신이 '아이들을 모두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사랑'에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


난 늘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진심으로 생각했다. 난 ‘어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성향 상 맞지도 않다. 특히나 나는 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할 생각도 없다. 덧붙여 의사는 교육 기간 중 끊임없이 환자와 감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경계하도록 훈련받는데 왜 교사는 정반대로 끊임없이 사랑하라고 세뇌받는가에 대해 나는 문제제기하곤 했다. 의사가 감정에 빠지면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볼 수 없듯이 교사도 그렇다. “내 자녀의 공부는 내가 못 봐준다.”는 말을 보호자들이 흔히 하는 것은 감정이 관여되었을 때 교육 활동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다. “근데 왜 자꾸 선생보고는 사랑하라고 그래!” 하며 화를 내곤 했었다.  
- 진냥,  [진냥의 인권이야기] 내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인권오름〉, 2012년 10월 31일.)


초등 교사인 진냥이 지적하듯이, 왜 의사는 환자와의 감정적 관계를 경계해야 하는데, 교사는 학생을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요구받을까? 교육이나 보육은 물론 관계 형성과 신뢰를 필요로 하긴 하지만, 그것이 곧 교사나 노동자의 감정적인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이는 그동안 어린이·청소년에 관련된 일, 교육이나 보육과 관련된 일들이, 사적인 영역, 가정 안의 일, '어머니/여성'의 일로 간주되어 왔던 이데올로기적 전통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경향성은 성차별적 문제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보육 등의 일에 대한 진지함이나 진정성, 성실성의 문제를 '사랑'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된다. 


이는 공적이고 또 조심스러워야 할 관계를 사적이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관계로 변질시킬 위험성이 있다. 실제 교육 현장에서도 이런 '사랑'은 자신은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잘못된 자신감의 원천이 되거나, 어른들이 하는 일이 모두 '너희를 위한 일'이라고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린이·청소년들의 독립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게다가 어린이·청소년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노동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헌신과 봉사로 지탱되기를 기대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교사나 보육 관련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보육자로서 어떻게!'라는 질타를 받게 하기도 한다. 이는 이러한 일들에 충분한 자원이 투여되지 못하고 개개인의 도덕과 헌신만을 요구하며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도 관련 종사자들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해롭다.


간혹 내가 오래도록 청소년운동을 해오고 있다는 걸 알고서는 나에게도 "청소년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라는 치사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청소년인권은 참 사랑하는데, 청소년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고 답하곤 한다. 나는 청소년인권이라는 사상 또는 청소년운동이라는 사회운동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어린이·청소년 개개인에 대한 애정은 거의 가지지 않고, 어린이·청소년 일반에 대한 애정은 더더욱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어린이·청소년 관련 일 종사자들이 자신의 일에, 노동에, 활동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기성세대 이후의 세대인 어린이·청소년에 대해 인류적인 사명감이나 애정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 차원의 사랑과 실재하는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사랑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 '사랑'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글쎄, 혹시 그저 내가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서 이해나 공감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무엇이 더 바람직한지 묻는다면, 교사나 보육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사회에서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관련 직업 종사자 분들을 만나면 과연 그것이 그 '아이들'을 평등한 인간으로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어떤 직업이라고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의무적으로 요구받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지도 묻고 싶어진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청소년 관련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청소년들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 미신으로부터 한시 바삐 벗어나길 바란다.





※ 2016년 4월에 〈인권오름〉에 쓴 글을 고쳐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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