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학생의 말할 자유의 공생 관계
고3 시절 어느 수업 중의 일이다. 담임이기도 했던 역사 교사가 수업 도중 시간이 좀 남자 딴 길로 샜다. 그때 그가 했던 이야기의 요지는 “사학과 나와서는 돈 못 번다”, “좋은 대학과 학과를 나와서 돈을 많이 버는 게 정답”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교사가, 자신이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문의 가치를 폄하하고 돈이나 많이 벌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영 듣기 싫어 옆 학생에게 귀마개를 빌려 귀를 막았다. 그것을 본 그 교사는 출석부로 내 머리를 때리면서 “수업 시간에 귀를 막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수업은 하지 않고 자기 인생관이나 잡담 삼아 늘어놓던 중이었다든지, 기분 나쁘게 출석부로 사람 머리를 때리지 말라든지, 여러 가지 지적할 거리가 떠올랐지만 참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물었다.
“귀 좀 씻고 오게 화장실에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말이 내 귀를 더럽혔다는 항의였다. 그 교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넘어가더니 수업 종이 울리고 난 뒤 내게 말했다.
“네가 무슨 허유냐. 귀를 씻게?”
그 교사는 역사 전공자답게 내 말에 곧바로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요임금이 숨어 사는 의로운 사람 허유에게 찾아가서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려 달라고 했더니 허유가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흐르는 냇물에 귀를 씻어 냈다는 이야기 말이다. 내 대답은 당연히 이러했다.
“아뇨. 설마요. 그럼 선생님은 요임금이게요?”
요임금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인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 것을 돈이나 잘 벌라는 이야기랑 비교하는 것은 좀 너무한 일이었다. 그 뒤, 나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실제로 귀를 씻었다. 나 혼자만의 퍼포먼스였겠지만.
그런데 이때처럼 한마디 해 주지도 못한 비슷한 상황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경제 과목을 가르치던 한 사회 교사는, 수업 중 한국의 복지 제도는 이미 잘돼 있어서 법적으로는 돈이 없어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만 제대로 운영이 안 되는 것은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다 빼먹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게 얼마나 왜곡된 이야기였는지는 몇 년 뒤에나 알 수 있었다. ‘깜둥이’들 나라는 국민이 게을러서 못사는 거란 이야기를 농담이랍시고 하는 교사도 있었다.
정부는 교사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일부 민간 단체들은 교사의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 또는 교사가 SNS에 정치에 관해 게시한 글 등을 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류의 이야기들이 문제된 것을 아직까지 들은 바 없다. ‘돈이나 열심히 벌어라’, ‘한국 복지 제도는 잘돼 있고 공무원이 문제다’ 이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은 또 어떻고. 최근 경기도, 광주, 서울, 전북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처음 시행될 때 많은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 인권 때문에 교육이 안 되고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대단히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였다.
정부가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공정하지 않게, 당파적으로 적용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활동은 정치적 중립성을 깨는 잘못이고 국정화 찬성 활동은 괜찮다는 잣대를 보여 주었다. 편파적이고 기울어진 법 적용이다. 그런데 그럼 공정하게 적용하면 되는 건가. 애초에 이 사회가 ‘정치적’이라 이름을 붙이는 기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입시 경쟁과 자기 계발의 논리를 설파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을 체제에 순응시키는 가장 대표적이고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참으로 정치적으로 편향된 행위다.
교사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건 교사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성숙한 학생들은 교사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니까 교사는 정치적인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학교 생활도 그랬다. 교사는 수업 중에 발언권을 독점하는 편이고 학생들은 거의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학생들이 교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느냐 하면 그건 별개의 문제지만, 교실에서 교사의 영향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최근에 들은 사례로, 한 교사가 ‘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건 뇌물을 준 것이다’ 따위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한 경우, 4대강 사업을 조사해 오라는 과제를 내고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내용을 내면 좋은 점수를 주고 장점을 조사해 오면 다시 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점만 생각해 보면 교사의 정치적 언행을 규제하는 것이 필요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애초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교실에서의 권력 자체를 문제 삼으면 문제를 달리 볼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은 교사가 교육 활동의 기획과 설계를 독점하며 학생보다 지적이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로서 미성숙하고 열등한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교육의 큰 그림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구조는 교사를 교육의 주체로,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를 인정한 채 교사의 정치적 성격만 문제 삼는 것은, 결국 학생들을 국가가 정한 커리큘럼과 견해대로만 따르게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구조 자체를 바꾼다면 교사의 영향력이나 권력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학생의 인권 문제, 학생을 교육의 주체이자 평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문제는 교사의 정치적 자유 문제와도 짝지어 간다.
거창하게 교육의 구조 자체를 갈아엎지 않더라도 이런 것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교사가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개인적 의견’임을 명확히 밝히게 한다면. 교사가 그런 개인적 의견을 말할 때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반박하거나 토론할 수 있게 한다면. 대학교에서는 이미 교수의 발언이나 주장에 대해 학생이 이견을 말하거나, 심각한 차별 발언 등은 대자보 등의 방법으로 공론화하는 일이 종종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도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없다.
아니면, 교사의 의견이나 발언을 다른 교사가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교사들이 토론을 하는 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지금의 학교는 교사들 사이에 서로의 수업이나 발언을 간섭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이 큰 실례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문화가 교실을 폐쇄적으로 만들고 한 교사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토론이 있는 교실’이나 ‘토론식 수업’ 같은 것들이 학생들 사이의 토론만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은 민주주의나 토론과는 거리가 멀다.
교사의 말에 ‘너의 말이 더러우니 나는 귀를 씻어야겠다’고 응대한 나는 많은 이들의 눈에 ‘싸가지 없는’ 학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뭐, 나도 귀를 씻겠다고 하기보다는 교사의 그 말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 반박할 수 있는 시간과 분위기와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면 참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앞서 언급한 교사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 교단에서 긴 세월 동안 일해 왔을 뿐이다. 앞으로는 교사들이 자기 말이 정치적이라고 욕 먹을까 봐 걱정하는 학교, 학생들이 귀를 씻고 싶어지는 학교보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남의 의견을 비판할 수 있는 학교 그리고 다른 사람의 반박이나 의견을 듣고 신경 쓰는 학교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 2016년 〈워커스〉에 썼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