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현 Dec 15. 2018

아직도, 독재다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



2014년 지방선거 때, 경기도의 19살 미만 청소년들이 교육감 후보들을 초청해 “표는 없어도 할 말은 있다”라는 이름의 토론마당을 열었다. 교육감 후보 5명이 오겠다고 했으나 후보들의 사퇴와 번복 끝에 이재정, 정종희 2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가 토론 현장에 나타나 딴죽을 걸었다. 후보가 참석하면 ‘사전선거운동’이 된다는 이유였다. 선거권 없는 청소년들과 토론하는 자리가 어째서 선거운동이냐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후보들은 인사만 한 뒤 자리를 떠야 했다. 한 선관위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은 선거운동 기간에도 이런 걸 하면 안 된다.” 그 말은 마치 너희는 그냥 입 다물고 있으란 소리 같았다.


한편, 2014년 4월 24일 헌법재판소는 청소년에 관한 두 개의 판결을 내놓았다. 하나는 16살 미만 청소년의 온라인게임을 야간에 강제차단하는 청소년보호법상 셧다운제가 합헌이라는 판결이었다. 헌재는 게임도 여가활동이긴 하지만 청소년에게 이를 규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결정했다. 다른 하나는 19살 미만 청소년에게는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의 자유, 선거권 및 피선거권, 주민발의 참여권 등을 주지 않는 공직선거법과 정당법이 합헌이라는 판결이었다. 헌재는 청소년은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을 갖추지 못했다면서 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까지 부정해버렸다. 같은 날 나온 이 두 판결을 나란히 놓고 보니, 미성숙한 너희들은 그냥 입 다물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처럼 읽혔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어른’에 의한 독재 사회다. 과거 한국이 ‘개발독재’를 했다면, 지금 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보호독재’를 한다. 청소년의 참여와 정치적 활동은 불허당하거나 금기시된다. 학교는 머리카락과 복장을 규제하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고 훌륭한 모습처럼 여긴다. 스마트폰 감시 앱과 위치추적 등으로 청소년의 일상을 사찰하고 통제한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 즉 체벌 등은 이를테면 고문과 구타에 해당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내정된 사람은 학교 체벌 금지와 학생인권조례도 반대한다던가? 너희는 미성숙하므로 폭력과 사찰을 당해야 하며 주권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세상, 이것이 독재의 풍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14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의 당선을 두고 말이 많다. 한쪽에선 기대를 보이고, 한쪽에선 우려를 보이며 직선제 폐지까지 거론한다. 그러나 어쨌건 거기에 청소년의 민주주의는 없다. 좋은 왕이냐 아니냐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왕도 왕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청소년이, 우리가, 주인이 될 수 있느냐다. 이는 교육감 선거 외의 다른 데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청소년은 학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민이고 시민이기 때문이다. 성숙이 어쩌고 이전에, 자신과 관련된 공적인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 이야기다.


나는 2014년까지 투표권을 가진 채 총 6번의 선거를 경험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이게 과연 청소년만의 문제인지도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대통령이 누군지와는 무관하게, 지금 이게 민주주의인가? 정말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건가?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오래된 시구를 되뇌어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2014년 6월 〈한겨레〉에 썼던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