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억지로 되려 할수록 멀어진다
나는 도인이 되고 싶었다.
더 침착하게, 더 자비롭게, 더 고요하게.
그래서 아침마다 명상에 앉고, 화가 날 때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잘못에도 이해하는 척했다.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도에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노력할수록 더 예민해졌다.
사소한 일에도 흔들렸고, 마음은 늘 불안했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지만, 속에서는 울화가 치밀었다. 억지로 자비로워지려 애쓸수록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까칠해졌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는 자책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마치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실패로 느껴졌고, 분노나 불안을 느끼면 ‘도에서 멀어졌다’는 공포가 덮쳐왔다. 노력은 쌓였지만, 자유는 멀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노력은 늘어가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도는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손에서는 자꾸만 빠져나가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애써서 도인이 되려 할수록, 도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내가 그리던 ‘도’는 진짜 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머릿속에서 그려낸 이상화된 자아상이었다.
나는 침착하고, 자비롭고, 고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타인의 눈에 흔들리지 않는 현자처럼 보이고 싶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너그러움과 평화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것이 곧 도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도가 아니라 이미지였다.
나는 ‘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줄 멋진 모습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겉모습은 고결하지만 속은 불안한, 허상에 불과했다.
도(道)는 본래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像)은 멈추어 세우는 것이다.
흐름은 살아 있지만, 형상은 고정되어 있다. 내가 좇았던 것은 흐르는 도가 아니라, 고정된 모양이었다. 그 순간부터 이미 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실제로 나는 ‘이상’과 싸우고 있었다.
조금만 흔들리면 “이상적인 도인이라면 저렇게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라며 나를 꾸짖었다. 화가 나면 “도인은 화내면 안 되지”라며 억눌렀다. 내 안의 모든 감정과 반응을 ‘이상’의 잣대로 재단했다.
결국 도를 따르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이상 속에 나를 끼워 맞추려 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좇던 것은 도가 아니라, 도처럼 보이고 싶은 나의 욕망이었다.
나는 늘 스스로에게 채찍질했다.
“화를 내면 안 돼.”
“이런 말 하면 안 돼.”
“도인이라면 흔들리면 안 되지.”
그렇게 마음을 단속하고, 감정을 누르고, 표현을 통제했다. 겉으로는 한층 점잖아진 듯 보였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달랐다. 화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쌓였고, 짜증은 눌릴수록 더 날카로워졌다. 억눌린 감정은 울화가 되어 터져 나왔고, 터진 뒤에는 더 깊은 자책과 허무가 찾아왔다.
나는 ‘참는 것’을 수행이라 착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자기 폭력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하며, 이상에 맞추어 나를 잘라내는 일이었다. 감정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데, 나는 그 증거를 부끄러운 것으로 몰아붙였다.
억지로 도에 가까워지려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조금만 흔들려도 “나는 아직 멀었어”라며 자신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정하는 삶은 결코 도의 길이 될 수 없다.
도는 억지로 다듬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래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스스로를 옥죄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마음은 점점 더 도와 멀어졌다.
나는 이제 안다.
억지로 참는 삶은 도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생명을 억누르는 자기 폭력일 뿐이다.
도는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도는 이미 흐르고 있고,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나를 맞추어 가는 일이다.
억지로 잡으려는 순간, 도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물을 움켜쥐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도 역시 힘으로 붙들 수 없다. 물은 움켜쥐는 자의 손에는 머무르지 못하지만, 오히려 손바닥을 편 자의 위에는 고요히 고인다. 도 또한 그렇다. 억누르고 다스리려 하면 사라지지만, 열어두고 받아들일 때 내 안에 머문다.
나는 오랫동안 ‘성취’를 목표로 삼았다.
도인이 되는 것도 하나의 성취라 여겼고, 수행은 곧 자기 극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것은 도가 아니라 욕망이었다. 도는 성취의 결과물이 아니라, 존재의 바탕이다. 이미 있는 것을 억지로 세우려 했으니, 오히려 멀어진 것이다.
도는 억지로 억누르는 데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데 있다. 분노가 올라오면 억누르지 않고, “내 안에 이런 파동이 있구나” 하고 바라보는 것. 불안이 올라오면 “나는 왜 불안할까”를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따라가며 배움을 얻는 것. 그 순간 도는 사라지지 않고, 나와 함께 흐른다.
이제 나는 안다.
도는 쟁취하는 승리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깨어 있음이다. 억지로 성취하려 할 때 멀어지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가까워진다.
진짜 수행은 의지를 다잡는 데 있지 않았다.
“오늘은 절대로 화내지 말아야지.”
“오늘은 반드시 자비로워야지.”
이런 다짐은 잠깐은 힘을 주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그 다짐이 실패하는 순간 더 큰 자책이 몰려왔다.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화를 억누르려 애쓰다가, 결국 폭발하고 나면 스스로를 더 미워했다. “왜 이렇게 안 되지? 왜 이렇게 약하지?” 수행은 점점 자기혐오로 바뀌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문제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화를 없애려는 억지 그 자체였다.
그 후로 나는 태도를 바꾸었다.
마음이 삐뚤어지려 할 때 억누르지 않고, 그냥 바라보았다. 질투가 일어나면 “나는 왜 질투하지?”를 따지기보다, “지금 내 안에 질투가 있구나” 하고 인정했다. 불안이 올라오면 없애려 하지 않고, “불안도 내 일부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이 단순한 전환이 내 수행을 바꾸었다.
마음은 조용히 흘렀고,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조금씩 중심이 돌아왔다. 정직하게 감정을 바라보니, 억누를 때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도는 억지로 지어낸 평온이 아니라, 정직하게 마주한 흔들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수행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 꾸미지 않고, 억지로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용히 흘러가도록 두는 것. 그것이 도에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억지로 되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도는 가까워졌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 웃을 때, 길을 걷다 바람을 느낄 때, 아무 의도 없이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 기울일 때 — 그 순간마다 마음이 고요해졌다.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도는 내 안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도를 따르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특별해지려는 마음이 도와의 거리를 만든다는 것을. 억지로 도인이 되려 할 때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그냥 나 자신으로 있을 때 도는 저절로 다가왔다.
도는 멀리 있는 신비가 아니었다.
도는 평범한 대화 속 웃음이었고, 밥을 나누는 소박한 손길이었으며, 홀로 있을 때의 편안한 숨결이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이미 도는 늘 곁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다짐하지 않는다.
“반드시 도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런 다짐을 내려놓을수록,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 속에서 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도는 되는 것이 아니다. 도는 돌아오는 것이다.
억지로 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도에 닿아 있다.
“도는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다. 억지로 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