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나를 고치고 있다 17화

나는 감정을 잘 모른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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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몰랐을 뿐이었다


“기분이 어때?”
그 단순한 질문 앞에서 나는 늘 머뭇거렸다.
입을 열면 나와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괜찮아요.”
언제부턴가 그 말이 내 감정의 만능 대답이 되었다.
괜찮지 않은 날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게 더 편했다.
‘괜찮다’는 말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눌려 있었다.
화, 슬픔, 억울함, 피로감…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단어로도 내 마음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답답했을 뿐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막혀오고, 이유 모를 피로가 쌓였다.
그게 슬픔인지 분노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감정은 분명 내 안에 있었다.
단지 그 감정을 읽고 말로 옮기는 기술이 멈춰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을 때,
나는 “그냥 기분이 나빴어”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기분 나쁨’은 사실 무시당했다는 억울함이었고,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존중받지 못한 슬픔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몰랐다.


감정이란 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언어였다.
어릴 때 배운 건 ‘기쁘다’, ‘슬프다’, ‘화난다’ 같은 단어뿐이었다.
그 이후의 감정들은 이름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오해받았다.
무표정하다고, 냉정하다고, 감정이 메말랐다고.


사실은,
나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설명할 언어를 잃은 사람이었다.


“감정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감정을 읽을 단어가 내 안에 없었던 것이다.”



2절. 나는 왜 감정을 잘 모르게 되었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감정을 배우지 못했다.
아니, 감정을 숨기도록 배웠다.


화가 나면 “그 정도 가지고 왜 화를 내?”
울면 “그게 울 일이야?”
조금이라도 감정이 드러나면 ‘유난스럽다’, ‘예민하다’는 말이 따라왔다.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경고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참고 사는데 너만 왜 그래?”
그 말은 나를 참는 쪽의 사람으로 길들이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침묵을 배웠다.
감정이 올라오면 바로 눌렀다.
눈물이 고이면 목구멍을 막았다.
억울하면 웃어버렸다.
‘표현하지 않기’는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 되었고,
그 기술은 언젠가부터 습관이 되었다.


문제는 그 습관이 너무 오래가서
감정이 떠올라야 할 순간에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게 되었다는 거였다.
화를 내야 할 때 머리로만 계산했고,
슬퍼야 할 때 “괜찮다”는 말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건 어른스러움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사람들은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감정을 느끼는 방법 자체를 잊고 있었다.
감정을 말하면 다칠까 봐,
감정을 꺼내면 누군가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렇게 나는 스스로의 감정에게도 벽을 쳤다.


결국,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 뒤편으로 물러났다.
느껴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해도 이해받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감정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감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을 참는 법은 배웠지만,
감정을 읽는 법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3절. 감정 앞에서 늘 ‘논리’만 꺼내던 나


나는 언제부턴가, 감정이 밀려올 때마다 ‘이성’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도, 억울했을 때도,
“그 사람도 이유가 있었겠지”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이성으로 상황을 분석하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이해했는데 마음은 전혀 낫질 않았다.


그때 나는 몰랐다.
감정은 이해로 치유되는 게 아니라, 인정으로 회복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늘 내 감정을 설득하려 들었다.
“그럴 수도 있잖아.”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이런 말들을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내 감정을 납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건 위로가 아니라, 억압의 또 다른 형태였다.
감정을 논리로 다루려는 순간,
감정은 “나는 잘못된 감정인가?”라며 움츠러들었다.
그럴수록 감정은 내 안 깊숙이 숨어버렸다.
보이지 않게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터져버리곤 했다.
그리고 터지고 나면 또 후회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예민했지?”
그 후회는 나를 다시 침묵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은 기가 막히게 읽어내면서도,
정작 내 감정은 외면했다.
타인을 위로할 때 쓰던 그 따뜻한 언어를
내 감정에게는 한 번도 건넨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논리적인 사람이 된 걸까?
사실, 논리적이 된 게 아니라 상처받지 않으려 방어적이 된 것이었다.
감정을 꺼내면 혼날까 봐,
감정을 드러내면 약해질까 봐,
감정 대신 ‘이성의 갑옷’을 입고 살아온 거였다.


그 갑옷은 나를 보호해 줬지만,
동시에 나를 고립시켰다.
감정 없는 대화, 감정 없는 관계, 감정 없는 나.
이성의 언어만 남은 세상에서
나는 점점 나 자신과의 대화 능력을 잃어갔다.


“나는 내 감정을 설득하느라,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 준 적이 없었다.”



4절. 감정은 느끼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예전엔 감정이 단순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소리치는 것.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감정은 느낌이 아니라, 신호였다.
그리고 그 신호는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였다.


감정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지 않는다.
조용히 쌓인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무시당한 순간 하나가
작은 점처럼 내 안에 찍히고,
그 점들이 연결될 때 비로소 감정이라는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나는 그 점을 읽을 줄 몰랐다.
감정은 느꼈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짜증 난다’고 말했을 때
그건 단순히 불편함이 아니라,
“지금 나의 경계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분노의 신호일 수도 있다.
‘서운하다’는 감정 속에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슬픔의 흔적이 숨어 있고,
‘무기력하다’는 말에는 ‘이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포기감이 담겨 있다.
이렇듯 감정은 해석되지 않으면,
그저 막연한 피로로 남는다.


나는 그걸 너무 오랫동안 ‘기분 탓’이라 치부하며 넘겼다.
그래서 감정은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감정은 반복되는 불편함 속에서
“나를 봐달라”라고 계속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무시할수록, 감정은 더 큰 형태로 터져 나온다.


결국, 감정은 억누를 대상이 아니라 번역해야 할 언어였다.
읽지 못하면 고장이 나고,
읽어내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
감정을 느낀다는 건 그저 자극에 반응하는 게 아니다.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건
그 감정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감정을 느낀다고 다 아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났다’는 것을 아는 것과
‘왜 화가 났는지’를 아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그 차이를 깨닫는 순간, 감정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시키는 메신저가 된다.


“감정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읽혀야 비로소 나의 언어가 된다.”



5절. 감정 어휘 확장 연습


감정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끝내 나도 모르게 사라진다.


나는 처음으로 노트를 꺼내 적기 시작했다.
“오늘 느낀 감정 세 가지.”
처음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피곤함, 답답함, 무기력.’
세 단어로 정리해놓고 보니
이건 감정이라기보다 상태의 나열 같았다.
그래서 한 줄 더 적었다.
“왜 피곤했지?”
“누가 답답하게 했을까?”
“무기력함 속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그때 처음으로 단어들이 달라졌다.
‘피곤함’은 사실 ‘하고 싶은 말을 삼킨 피로감’이었고,
‘답답함’은 ‘이해받지 못한 서운함’이었다.
‘무기력함’ 속엔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 슬픔’이 숨어 있었다.
단어를 바꾸자, 감정이 살아났다.
그건 마치 오래된 전등의 불빛이 깜빡이며 다시 켜지는 느낌이었다.


감정의 언어는 단순하지 않다.
‘짜증’이라는 단어 아래엔 억울함, 피로감, 배신감, 불안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감정을 기록할 땐 ‘감정 사전’을 여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하루 한 번,
“오늘의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세 줄을 썼다.


1. 오늘 나를 가장 강하게 흔든 사건
2. 그때 느꼈던 감정 단어 3개
3. 그 감정이 내게 말하려던 문장 한 줄


이 짧은 기록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내 감정은 점점 말이 생겼고,
말이 생기자 감정이 정리되었다.
그전엔 막연히 불편하고 막막했던 하루가,
이제는 ‘이건 슬펐고, 이건 억울했고, 이건 괜찮았다’로 구분되었다.


이 구분이 바로 회복의 시작이었다.
감정을 구체적으로 부르면
그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지 않는다.
이름 붙여진 감정은 방향을 갖는다.
그건 마치, 어둠 속에서 불빛에 이름을 붙이는 일과 같았다.
“아, 이건 분노였구나. 이건 서운함이었네.”
이 짧은 깨달음만으로도 마음은 조금씩 풀렸다.


감정은 기록될 때, 존재를 회복한다.
말로 쓰고,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 감정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지 못한다.
나는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감정을 기록한다는 건,
감정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6절. 오늘의 점검 질문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감정을 안다는 건, ‘느낀다’가 아니라 ‘관찰한다’는 말이었다.
감정은 나를 휘두르는 폭풍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날씨 같은 존재였다.
비가 오면 비를 인정하고, 바람이 불면 창문을 닫듯이.
감정도 억누르거나 피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그저 알아차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파동이 일어난다.
감정은 늘 거기 있었다.
다만 내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감정은 낯선 침입자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된다.


오늘의 점검 질문은,
단순히 감정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건 나와 다시 연결되는 의식의 루틴이다.


나는 오늘 하루, 어떤 감정을 무시했는가?
누군가에게 웃었지만 사실은 상처받지 않았는가?
혹은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는가?


그 공백조차도 감정의 한 형태다.
‘느끼지 못함’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감정은 나를 고장 내는 원인이 아니라,
나를 살아있게 하는 신호였다.
그 신호를 듣는 훈련이 곧 자기 이해의 첫걸음이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귀 기울이는 시간.
그건 어쩌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다시 불러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내게 조용히 말해본다.
“괜찮아, 아직은 잘 몰라도 돼.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배워보자.
너의 감정은 틀린 게 아니라,
그저 오래된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이야.”


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나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정을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완벽히 알지 못하지만,
오늘도 한 걸음 더 배운다 —
감정은 나의 언어다. 그리고 나는 그 언어를 다시 배우는 중이다.


“감정은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아니라,
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오늘 나는 내 감정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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