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근원은 미운 너였다 25화

날 울렸던 그 말이, 오늘은 고맙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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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그땐 그 말이 전부인 줄 알았다


“넌 왜 항상 그런 식이야?”


그 말을 들은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살짝 내려앉는다.
큰 소리도 아니었고, 특별히 날카로운 말도 아니었다.
그저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어 넘기 지도 못했고, 되묻지도 못했다.
그날의 나는 그 말 하나에
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마음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걸 느꼈다.


집에 돌아와 혼자 앉아 있을 때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왜 하필 그런 말이었을까,
왜 하필 내가 들었을까.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상처’라고만 불렀다.
나를 깎아내린 말,
나를 이해하지 않은 말,
나를 작게 만든 말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울었다.
울면서도 그 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말이 나를 설명해 버린 것 같았고,
나는 그 설명에 반박할 힘조차 없다고 느꼈다.


그땐 몰랐다.
그 말이 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 말이 나를 끝내는 말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세우는 말이었다는 걸.



2절 그 말은 오래 남아, 나를 따라왔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자주 꺼냈다.
어떤 선택을 하려 할 때도,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도
그 말이 먼저 나왔다.


“넌 왜 항상 그런 식이야.”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그 말은 조용히
나를 움츠러들게 했고,
괜히 시도조차 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고,
어쩌면 그 말에 나를 가둬버린
나 자신을 더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이상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프긴 한데,
예전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


그 말이 떠오를 때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았고,
대신 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게 됐다.


‘왜 그 말이 그렇게 아팠을까.’
‘왜 나는 그 말 앞에서 그렇게 작아졌을까.’


그 질문들은
나를 더 아프게 하기보다는
조금씩 나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때부터였다.
그 말이 나를 괴롭히는 흉터가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하게 만드는
작은 계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아주 천천히 느끼기 시작한 건.



3절 그 말이 나를 멈춰 세운 자리에서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예전처럼 가슴이 무너지지 않았다.
여전히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 속에서
조금 다른 감정이 섞여 나왔다.


그 말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방식으로 말하고,
익숙한 태도로 관계를 대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 없이
같은 자리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말은
나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멈춰 세우는 말이었다.


“항상 그런 식”이라는 말은
내가 반복해 온 어떤 태도와
무심코 넘겨왔던 습관들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했다.


그때는 억울했다.
왜 나만 그렇게 보였을까.
왜 그렇게 단정 지어졌을까.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 말 앞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나는 어떤 식이었을까.’
‘나는 내 마음을 어떻게 다뤄왔을까.’


그 질문들은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향을
조금 틀어주었다.


그 말은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세워두고,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팠지만,
그만큼 정직했던 순간이었다.



4절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그 말이 더 이상 나를 몰아붙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말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묘하게 건조한 온도.


그 말은
나를 위로하려는 말도 아니었고,
나를 파괴하려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서
툭 떨어진 말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늘 말에 의도를 덧씌웠고,
그 의도 속에서 상처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말에는
내가 생각했던 만큼의 악의도,
깊은 계산도 없었다.


그저
서툰 표현,
짧은 인내,
그 사람의 한계가
말의 형태로 지나간 것뿐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를 조여오던 감정의 끈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말은 여전히
아프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이 나를 흔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말 덕분에
나는 예전보다
말을 조심하게 되었고,
사람의 마음을 한 번 더 살피게 되었다.


상처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자리를 옮겼다.
나를 무너뜨리던 기억에서,
나를 다듬는 기준으로.


그 말이 남긴 건
흉터가 아니라
조심스러움이었고,
분노가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는 여유였다.


아마 그것이
아픔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변화였을 것이다.



5절 그래서 오늘은, 고맙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그 말을 떠올려도
가슴이 내려앉지 않는다.
그날처럼 울지도 않고,
애써 잊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 말은
내 삶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을 뿐,
나를 규정하는 문장은 아니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 말이 나를 바꾸게 한 건
의도나 친절함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이
조금 무례했고,
조금 날것이었기 때문에
나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나는 그 말 덕분에
내가 반복하던 방식을 보게 되었고,
내 마음을 다루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게 말할 때
한 박자 더 늦춰 생각한다.
말이 닿는 자리를 떠올리고,
그 말이 남길 여운을 상상한다.


그 변화가
그 사람 덕분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 말이 계기가 되었던 건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은
조심스럽게 이런 마음이 든다.


고맙다.
나를 울게 해서가 아니라,
나를 돌아보게 해서.


고맙다.
나를 작게 만들었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지나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꼭 다정한 기억에게만 건네는 게 아니란 걸
이제는 안다.


때로는
가장 아픈 말이
가장 오래 남아
나를 바꾸기도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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