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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사람 Jul 16. 2020

글쎄, '존버'가 답인 듯

"선배, 할 말이 있는데.."


며칠 전 후배가 할 말이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10년 차에 접어들면서 후배가, 그것도 여자 후배가 "할 말이 있다"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을 건넬 때가 제일 무섭다. 보통일이 아닐 때가 많아서. 제발 해결하기 쉬운 일이라면 좋을 텐데, 마음을 단단히 먹고 후배와 마주 앉았다.

"OOO선배가 '나는 여자랑 일 못해'라고 했어요."

후배의 말을 듣자마자, '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후배는 분노에 차서 말했지만 솔직히 나는 안심이 됐다. 일단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류의 일이 아니라서.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겠어요가 아니라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그래?"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후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그 인간은 그런 얘기를 하는구나. 10년 동안 들어서 별로 감흥도 없다."

후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일, 그러니까 성차별이 흔한 일이라는 게 90년대생, 게다가 이제 막 입사한 여자 후배에게는 충격인가 보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에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닐 거야'라고 미화하기엔 그런 뜻이 맞아서 그 선배를 감싸줄 생각은 없고.. 언론사라는 조직이 보수적이야. 워낙 남초 조직이기도 하고 일이 좀 공격적이고 거칠다 보니 본인들은 남자라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좀 있고."

주절주절 설명하려다 그냥 현실을 질렀다. "더 솔직히 말하면 10년 전에도 들었고, 나도 그때 너처럼 열 받았고. 10년 전 나나 지금의 너나 열 받고 고민하는 포인트가 똑같아. 크게 달라진 게 없지. 근데 말이야. 아주 조금씩, 천천히 달라지는 것도 있어. 10년 전엔 저런 말을 술 안 먹고 맨 정신에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술자리에서,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 하잖아. 우리가 뭐라고 따지면 '기억 안 난다' '내가 그런 말 했냐. 미안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이제 그런 말도 머리 써가면서 해야 하는거야."

말을 다 듣고 나자 후배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피식 웃음도 새어 나왔다. 

                                              

"혹시, 그거 나는 아니지?"


모든 직장인이 자신이 속한 조직이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고루하다고 자부할 테지만, 언론사만큼 보수적이고 고루한 곳이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판교 IT 대기업 직원과 기업문화에 대해 인터뷰를 했는데, "저희끼리는 구글도 코리아가 붙으면 그냥 한국기업이라고 말해요. 외형적인 건 좀 자유로워 보이지만, 운영방식이나 철학은 전형적인 한국식이에요"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은 적이 있다. 왠지 모를 안심이 들었달까.

'성인지 감수성'도 마찬가지다. 언론사만큼 남녀차별이 확고하게 이루어지는 곳도 없다. 웬만한 종갓집 못지않다. 굳이 여성 편집국장, 임원 수 같은 걸 따지지 않더라도 신입기자 선발과정과 결과를 따져보면 최종 면접에서 약 70%를 차지하던 여성 지원자들이 최종 결과에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아주 극소수만 살아남는다. 어떤 경우엔 단 한 명 살아남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그렇게 적금 들듯 차곡차곡 수를 늘려온 여성기자들끼리 '미투(ME TOO)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의 미투를 고발했을 때다. 성희롱과 성추행뿐 아니라, 성차별도 예외 없이 고발했다. 보고서가 사장님 포함, 회사 직원들 모두에게 이메일을 통해 배포됐다. 비난이 쏟아질까 봐 쫄았는데,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응이라면 "혹시 그거 나는 아니지?"라는 자기 검열(?) 정도. 까놓고 한번 이야기해보자 식의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으면 했는데, 아주 조용히 지나갔다. 그래도 그 이후 조금은 성차별 발언이 수그러들었고 표면에 드러난 성희롱과 성추행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사실이 있을 수 있으니)

머릿속에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말과 행동에 여성 동료를 대하는 '조심성'이 가미되며 그럭저럭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머릿속에 박힌 생각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글쎄, 존버가 답인 듯" 


억울하지만, 증명하는 것 밖엔 방법이 없다. 여자랑 일할 때 성과가 얼마나 좋은지를 보여주고 여자랑 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고작 10년이지만 그간 기자로 활동하면서 느낀 깨달음이다.

후배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원하는 듯했다. 

"글쎄, 존버가 답인 듯" 

후배가 크게 웃었다.  "피하지 마. 더럽고 치사해도 계속 버티고 부딪혀서 당신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줘야지. 그게 지난 시간 우리가 해온 방식이야. 버텨서 내년, 내후년, 그다음 해에 들어오는 후배들한테 네가 전해줘." 


"버텨주세요"

-최근 용기 있게 성추행 피해사실을 고발한 '고소인' 서울특별시 공무원이 지금도 서울시 산하의 조직에서 일하는 것에 감명받았습니다. 브런치에 발행하는 나의 첫 글은, 그의 용기에 힘을 얻어 개인적 경험으로 시작합니다. 이런 류의 작은 일 조차, 기자라는 직업의 사람도 표면에 끄집어내는 일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가 피하지 말고 버텨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당신으로 인해 어떤 것은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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