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비 핑계로 집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동안 쌓였던 찌뿌둥함 때문일까. 무언가에 떠밀리듯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낮에 세차게 몰아치던 비도 저녁이 되니 지친 듯, 물구덩이만 잘 피한다면 걸을 만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후드득….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을 보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세상을 향해 가차 없이 사선을 긋는다. 엄청난 속도로 이곳까지 날아왔을 터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나뭇잎은 다이빙보드처럼 가볍게 그들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일까. 천천히, 천천히, 잎맥을 따라 내려오는 방울들. 매정했던 그 삶의 속도가 홀연히 느려진다. 느긋하고 너그러워졌다.
빗물을 한껏 머금은 풀들은 어제보다 오늘 더 진한 색과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어제 비어 있던 벤치 위에는 오늘 주먹만 한 돌덩이 서너 개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고, 매일 같이 같은 곳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흰 모자의 할아버지가 오늘은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멍하니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제 내 옆을 스친 사람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우리 모두는 삶의 속도가 다르다. 지금, 이 순간은 그들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서로 만나는 시간. 그들이 나를 보고, 내가 그들을 볼 때 삶은 변주가 시작된다. 그러니 어제 걸었던 길과 지금 걷는 길이 다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도 다르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우산을 쓰고 이 길을 걷는다. 다른 나와 다른 네가 서로 만나는 시간. 변주된 삶이 아름답다. 이 길을 매일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