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공간. 나에게 그곳은 무엇을 감추는 곳이라기보다는 지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언제든 가서 따뜻함을 마실 수 있는 곳,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편안히 구경할 수 있는 곳. 그곳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곳은 1층에서 다섯 계단 정도 올라가면 있었다. 밖에서 보면 분명 이층집인데, 이 건물에는 일 층과 이 층 사이에 반 층 공간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잠시 옆으로 빠진 특이한 곳이다. 건축주는 어떻게 이런 곳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1층에서 카페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은 이곳을 넉넉하게 손님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곳에 앉아 따뜻한 컵에 손을 대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재미의 비밀은 그들을 바라보는 각도였다. 그 각도의 시선은 어디서든 경험할 수 없었다. 2층에서 내려다본다면 정수리가 보이겠지만, 그곳에 앉으면 30도쯤 위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런 시선은 편안함을 주었다. 꿈과 현실 사이, 그 어디쯤인 듯하였다.
그곳에서 파는 단팥죽은 정말 맛있었다. 팥과 찹쌀, 설탕 이외에는 그 어떤 재료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단팥죽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듯함은 나의 무거운 몸을 가볍게 들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지갑을 들고 오지 않은 날에는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지나가곤 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가끔은 나만 아는 장소라며 뭔가 큰 인심을 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곳이 하나 있는데,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줄게.” 이런 말 한마디면 10년의 세월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던 후배와도 놀라운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그곳에 가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입 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각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켜줄 것 같았던 부모님의 약해진 모습, 험담이라고까지 말하기는 뭐한, 우리들 주변의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런 얘기를 하고 밖으로 나오면 우리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올여름에는 그곳에서 팥빙수를 게시했다. 온갖 종류의 화려한 팥빙수를 파는 전문점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오직 하나, 계피 넣은 팥빙수가 있었다. 카페 주인은 계피를 담은 커다란 도자기 그릇을 주문대 앞에 두었다. 팥빙수를 주문하라는 무언의 유혹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려고 하다가 그 향기가 코에 들어오면, “팥빙수도 주세요”라는 말이 마법에 걸린 듯 나오고 마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바람이 쌀쌀해지니 따뜻한 단팥죽이 생각났다. 이런저런 바쁜 일로 한 계절이 바뀌도록 찾아가 보지 못한 곳을 오늘 가본다. 하지만 한 계절 만에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이 왜 이렇게 허전할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그곳은 영원했으면 했다. 허탈한 마음을 글로 쓰려니 말줄임표 하나로 충분해 보인다. “…….”
허한 마음에 카페 건물 뒤로 나 있는 산책길을 올랐다. 하지만 그곳도 말줄임표를 써야 할까. 나무가 우거진 좁은 언덕길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뿌리째 뽑힌 채 넘어져 길을 막고 있다. 얼마 전 내린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나 보다. 수북이 쌓여 있던 눈은 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말라 얄밉게도 사라져 버렸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나무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돌아와야 했다. 길옆으로 흐르는 개천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큰 소리가 들린다. 지난번엔 오리들이었는데, 이번엔 초등학생들이다. 아이들은 개천에서 팔뚝만 한 돌을 옮기며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른다.
“야, 그걸 거기다 놓으면 어떡해? 저 뒤에 놓으라니까.”
“야, 여기나 거기나 뭐가 달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옥신각신한다. 그러게. 여기나 거기나 뭐가 달라. 어제까지는 여기 있었지만, 오늘은 다른 곳에 있겠지. 아이들의 목소리가 텅 빈 마음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