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틀 전 여자 컬링 선수들이 스웨덴을 상대로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난 후, 어제는 4강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를 결정짓는 경기가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캐나다와의 경기다. 현지 경기장 사정으로 예정보다 30분 이상 경기 시작이 지연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밤 10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 경기가 10시 30분이 지나서야 시작하였다.
올림픽에 관한 관심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거리가 멀고 시차도 많이 나서 그런 걸까. 과거 평창 올림픽이나 베이징 올림픽에 비해 이번엔 가슴 졸이며 느끼는 짜릿함이 스트레스로 옮겨가는 느낌이 컸다. 더군다나 늦은 시간에 몇 시간씩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집중했더니 소화도 안 되고 허리도 아프다. 우리나라 선수가 계속 나온다면 긴장의 끈을 못 놓겠지만, 나와는 아무 관계 없는 다른 나라 선수가 줄곧 나오고 그들의 비슷한 몸짓이 하얀색 설상 위에서 계속되면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그렇게 대낮에 졸다가 밤에 잠이 안 오는 후유증도 생겼다.
아무리 세계 최강이라고 하지만 스포츠는 이변과 변수의 이벤트이다. 불확실성이 없다면 무슨 감동과 재미가 있을까. 평소라면 하나둘 불이 꺼져야 할 창밖 다른 집들이 자정이 넘고 새벽 1시가 되어도 환희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주에서 보면 지구 어느 곳에 불빛이 서로 이어져 하나의 별자리처럼 보일 거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경기가 지연된다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긴장감이 떨어지더니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늦게 자던 습관이 있어 잠도 오지 않으니 책상 한쪽에 두고 표지만 보던 단편소설집을 펼쳤다.
몇 해 전 즐겨 다녔던 도서관 생각이 났다. 경사를 한참 올라야 있는 이 도서관은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단점도 되고 장점도 된다. 동전의 양면이다. 4차선 도로, 버스 정류장에서 그곳을 올려다보면 마치 산 중턱쯤 있는 듯 보인다. 무릇 도서관이란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늘 가까이 있는 게 좋겠지만, 나처럼 인적 드문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만한 곳도 없었다. 더군다나 걷는 걸 좋아하는 내게 그 정도 경사는 기분 좋게 땀이 날 정도이니 반갑기만 했다.
처음엔 책 읽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좋아서 자주 다녔다. 두툼한 통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8인용 넓은 테이블을 혼자 독차지 하고 앉아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회원 등록을 하고 처음엔 잡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건축, 여행, 공예, 회화, 과학….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많은 잡지가 있을 줄은 몰랐다. 흥미가 조금 떨어질 무렵이 되면 새로운 잡지가 들어왔다. 퇴근 후 업무를 아예 여기로 가지고 와서 한 시간 정도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업무가 지겨울 때면 문예지 쪽을 한바퀴 돌다가 최근 문학상을 받은 소설집을 꺼내 읽었다. 그렇게 읽다 보니 소설의 최근 경향이 느껴졌다. 폭력, 살인, 자살, 학대…. 이야기에는 갈등이 있어야 한다지만, 어둡고 피가 낭자한 소재만 마주친 건 우연일 거라며 책을 꺼낸 손을 탓했다. 하지만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소재 하나쯤은 다루어야 하나, 하는 마뜩잖은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당시 내가 소설책과 조금 거리를 두게 된 계기가 된 듯하다. 친구들과 잡담하다가 이런 이유로 소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십중팔구 그들은 영화 <범죄도시>는 왜 그렇게 좋아하냐며 반문했다. 이중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어젯밤 오랜만에 소설집을 들고 뭐부터 읽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책은 첫 페이지부터라는 상투적 생각에 맨 처음에 있는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은 모두 여섯 명인데 실제는 세 명 정도가 주동이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갔다.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시시한 농담과 먹고 사는 일상을 나누는 스토리는 한 줄 한 줄 꽤 매력이 있었다. 그들의 잡담에 나도 끼어들어 커피 한 잔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과는 너무 다른, 그들 머릿속에서의 생각을 탐험하는 것도 재밌다. 나도 저럴 거 같은데, 하는 생활밀착형 이야기다. 피도 없고, 주먹도 없고, 칼도 없는데 소설이 왜 이렇게 재밌냐….
단숨에 단편 두 개를 읽었다. “꺅….” 거실에서 딸이 소리를 질렀다. 같은 “꺅”이라도 느낌이란 게 있다. 좋은 느낌? 안 좋은 느낌? 나는 두 선택지를 두고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이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켰다. 4대 5. 우리나라가 지고 있었다. 분명 기분이 안 좋았는데, “꺅” 소리의 의미는 맞췄다는 이상한 희열감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은 전반이다. 1점 차이라면 후반에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당장 거실로 나가서 딸과 함께 유대감이라는 별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소설이 주는 여운을 놓칠까, 나는 그걸 끌어안고 잠을 자기로 했다.
오늘 아침, 분명 꿈을 꾼 거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컬링 경기를 한 것 같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떤 것 같기도 하다. 한 차례 더 “꺅”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으나 잠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입춘이 지나서인지 봄기운이 느껴지고 몸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어제처럼 가볍게 동네 한바퀴를 돌고 왔다. 중학생만 한 남자애 셋이 온 동네가 자기네 세상인 듯 떠들며 장난을 쳤다. 저들에게는 봄이 더 일찍 찾아오는 모양이다. 그동안 수고한 컬링 선수들도 오늘은 냉혹한 빙판 대신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 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