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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Jul 20. 2024

결승선은 없다

<There is no finishi line>

이 글은 나이키의 광고 캠페인 <There is no finish line>, “결승선은 없다”에 관한 사색 내지는 소개다. 나이키 창업자인 필 나이트의 자서전 <슈독>을 재미나게 읽은 독자로서 나는 이 광고가 던지는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는 무언가를 위해 그토록 노력해 본 적 있는가’하며 씁쓸한 마음을 삼켜내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이해한 방식대로 이 광고를 소개할 작정이다. 무언가에 간절히 미쳐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자그마한 청사진을 보여주고자, 이 글을 쓴다. 




지난 5년간, 나는 한 해에 약 100권의 책을 읽으며 강박적인 독서를 이어나갔다. 이유는 단 하나, 책이 나를 구원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믿었다. 어느 순간에는 ‘드디어 진리를 깨달았어. 난 행복해.’라고 말하다가도, 갑자기 ‘아니야,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더 완전해지기 위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독서에 더 집착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또 읽던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책이 주는 지식 덕분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독서 자체가 행복이었다. 이 자그마한 깨달음을 이제부터 아주 길게 설명해보려 한다. 




1.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한 러너



결승선은 없다


“조만간 진지한 러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당신을 높은 의식 상태로 몰아넣는 새로운 종류의 신비로운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기쁨의 섬광

달릴 때 떠다니는 느낌. 


그 경험은 우리 모두 저마다에게 

독특한 것이지만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당신을 평범한 러너들과 분리하는 장벽을 부수게 됩니다. 


영원히.” 



아직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겪어보지 못한 러너는 목적을 가지고 달린다. 다이어트를 위해서, 우승을 위해서, 경쟁자를 꺾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심지어는 행복을 위해서. 이처럼 명확한 목적을 갖고 진지하게 달리기에 임하는 러너는 곧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행복’이라고도 부르는, 누군가는 ‘초월성의 언저리’라고도 부르는, ‘환희’, ‘지복’, ‘신’, ‘천국’, ‘기쁨의 섬광’, ‘정점’,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 ‘열정’, ‘신과의 합일’이라고 부르는 그 상태를 경험한다. 그때부터 달리기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결승선이라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당신을 위해 달리는 것이죠. 


당신은 달리기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것에 

푹 빠지기 시작합니다.” 



러너는 더 이상 목적을 가지고 달리지 않는다. 달리기가 곧 목적이자 행복이며, 천국이자 신과의 합일이다. 그들은 달리는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의 독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독서하는 동안만큼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나는 그동안 그것이 독서 덕분이 아니라, 책이 주는 지식 덕분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아니, 분명 책이 주는 지식 덕분에 행복했던 시기도 있었으리라.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였을 때. 그러나 나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독서 그 자체에서 무한한 살아있음을 느꼈다. 달리기로 치면, 건강을 위해서 달리기 시작한 러너가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라는 행위에 온전히 만족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때부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2. 핵심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미치는 데 있는 것이야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는 안 그랬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생의 모습을 마치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러너의 모습, 정상만을 바라보며 산을 오르는 산악인의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결승선에 도착한 일부 사람들 또는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은 깨닫는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中



곧이어 “인생이라는 것이 성공이라는 정상을 향해 꾸준하게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들은 끝없는 절망과 공허함의 골짜기로 추락한다. 그들이 마침내 추락을 멈추자마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다시 산을 오른다. 하지만 그때의 등산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정상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를 뿐이며, “오직 달리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달린다. 그때부터는 “어느 누구도 결승선을 정해주지 않는다. 당신만이 결승선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사람들 혹은 특별한 경험을 아직 해보지 못한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반드시 일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을 대표하는 인간이며 현실과 상식의 아이콘인, 판사이자 돈키호테의 조수 산초는 돈키호테에게 묻는다. 



“그런 짓을 한 기사들은요, 그런 바보짓이나 고행을 할 이유가 있었거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나리께서는 일부러 그렇게 미쳐야 할 이유가 있나요? 어느 귀부인이 나리를 멸시했나요? 아니면 둘시네아 델 토보소 님이 무어인이나 혹은 기독교인하고 무슨 유치한 장난이라도 했다는 증거라도 잡으셨나요?” - <돈키호테> 中



그렇다. 우리는 무언가에 미쳐있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돈키호테는 답한다. 



“바로 그거야. 그게 내 일의 절묘한 점이네. 편력 기사가 이유가 있어서 미친다면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나. 핵심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미치는 데 있는 것이야. 내 귀부인으로 하여금,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는데 저만한 일을 하시는 분이니 무슨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일을 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지.”



궁극의 러너, 궁극의 작가, 궁극의 독서가, 궁극의 산악인, 궁극의 돈키호테들은 말한다. “핵심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미치는 데 있는 것이야.” 그저 살아있음을 느낀다. 심지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행하는 것도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선원의 베이커 선승은 “’왜’라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사물은 그냥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도 ‘왜’가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왜’라는 질문은 심리학자들에게나 떠넘기라. 진짜 삶의 세부적인 정보를 구하라. 당신이 글을 쓰기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러니 계속 쓰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中



그들은 자신이 그것을 하길 원한다는 사실만을 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그들은 한 가지 심오하고도 오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의 도구임을 깨닫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도 사람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공부한다는 <바가바드 기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자신을 나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하도록 노력하라.”



여기서 말하는 ‘나’는 크리슈나, 신이다. 즉, 자기 자신을 신의 도구라 생각하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행위할 때 우리는 신과의 합일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나의 도구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자신을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다. 우리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는 관찰자이자 신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통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했을 때 ‘신과의 합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신’을 구체적인 존재로 생각했지만, 어떤 현자와 학자들은 이것이 구체적 존재가 아닌 ‘상태’라고 말한다. 우리가 처음에 말한 그것, ‘살아있음’ 혹은 ‘기쁨의 섬광’, 보편적으로는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즉,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한 러너들은 점점 자신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만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당신은 그저 당신 속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다.”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中



처음 독서를 시작한 독서가들은 읽을 책을 찾아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수많은 책 중에 어떤 책을 골라야 하나.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내가 책을 선택하지 않는다. 책이 나를 선택한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다음에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처럼, 책이 마치 ‘물 흐르듯이’ 선택된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계시임을 받아들인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가 곧 내가 된다. 나는 사라진다. 그리고 마치 소명처럼, 명상처럼, 좌선처럼, 달리기처럼 이 책을 읽는다. 그저 따라갈 뿐이다. 


이 순간부터 이들은 “운전대를 그냥 놓아버린다.”(<두 번째 산> 中) 즉, 내가 책을 읽으며 얻고 싶은 것, 내가 바라는 것을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독서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내가 하는 이 모든 경험들이 나에게 무엇을 공감하기를 바라는지 묻는다. 재밌게도 내가 나를 포기하고 놓아버릴 때, 내가 누구인지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3. 공감은 어떻게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가? 



이처럼 경지에 다다르면 마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 식물이 자라나듯, 무한한 믿음과 공감의 샘이 솟아나고, 자연적으로 행동이 일어난다. 영웅이 세상에 나가 싸우는 시점이다. 처음엔 돈키호테처럼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반면, 그들은 그저 이끌리듯 나아가기 때문이다. 영웅은 모두 상식 밖의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믿음’과 ‘공감’이라는 중심이 있다. 필 나이트는 말한다. 



“나에게는 달리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킬로미터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달리기라는 행위에서 궁극의 경지에 다다랐고, 그 결과로 달리기에 대한 믿음과 스포츠맨에 대한 공감을 선물 받았다. 편력기사에 관한 소설을 미친 듯이 읽어서 진짜로 미쳐버린 돈키호테 역시 공감의 기사였다.



“어리석긴. 편력 기사들의 일은 괴로워하는 자나 사슬에 묶여 있는 자나 억압받는 자들이 그런 모습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 이유가 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짓들 때문인지 알아보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고약한 행위를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눈을 돌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기사의 임무란 말이다”



그렇다. 공감이란 그저 고통에 눈을 돌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돕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의 위력을 깨달은 사람은 성배를 발견한 사람이다.”(조지프 캠벨).


한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한 마디 말씀으로 평생토록 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길, 

“‘서’이리라.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바라지 마라.” 


‘서’란 무엇인가. 공자가 평생토록 행할만한 것이라 말한 ‘서’란 공감에 기반한 이해와 배려다. 그리고 ‘서’는 ‘충’이라는 단어와 세트를 이룬다. 충은 진심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진심을 다하는 자는 공감할 것이며, 공감하는 자, 진심을 다하여 행동한다. 



“모든 인간은 고통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심리치료 분야에서 나름의 체계를 개발한 사람들은 자신의 병력을 서술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 빅터 프랭클 



‘실존적 심리치료 기법’이라고도 불리는 로고테라피를 창안한 빅터 프랭클 역시 “로고테라피와 관련되는 한 나는 내가 젊은이로서 삶의 명백한 무의미함에 대한 좌절과 같은 지옥을 직접 경험했으며, 허무에 대항하는 면역체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허무주의를 경험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로고테라피를 창안했다.”고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밝힌 바 있다. 만약 그가 어릴 때부터 삶의 의미에 관하여 고민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런 고민이 무슨 쓸모가 있겠어?’라고 말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로고테라피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삶의 의미에 관하여 깊게 고민했고, 자신의 고통에서 비롯된 공감과 이런 치료기법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그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달리기, 독서, 삶의 의미 등 무언가에 진지하게 임하며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한 기사들은 어떻게 되는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가 된다. 여기 한 문장에 주목해보자. 



“그 경험은 우리 모두 저마다에게 

독특한 것이지만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당신을 평범한 러너들과 분리하는 장벽을 부수게 됩니다. 


영원히.”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어 경쟁력이 생길 거라 믿으며 애쓴다. 그러나 ‘행복’ 또는 ‘살아있음’은 사실 남과 나를 하나로 만들어준다. 우리는 왜 맛있는 것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가? 왜 좋은 것은 같이 보고 싶은가? 그것이 행복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나를 막고 있던 장벽을 부수는 것. 통합. 



“스포츠란 이런 것이다. 스포츠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책과 마찬가지로 스포츠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삶을 산 것처럼, 다른 사람의 승리 혹은 패배에 함께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스포츠 경기가 한창 달아오르면, 팬의 마음은 선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하나가 되는 곳에서, 이렇게 감정이 전이되는 곳에서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통합이 이루어진다.” - <슈독> 中



정말 스포츠만 그런가? 책만 그러한가? 아니다. 



"카타기리는 위대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한다. 미술가가 명화를 보면 자신도 명화를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는다. 예술가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영적인 사람은 평화를 발산한다. 하지만 카타기리는 이 영적인 사람들이 평화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삶의 노력과 그 순간을 움직이는 우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예술가들이 생명력 있는 작품을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요한 평화와 접촉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접촉을 이루지 못할 경우 예술가는 파멸한다고 했다.”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中



그렇다. 그림도, 명상도 모두 같다. 하지만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지난한 삶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러너가 특별한 경험을 하기까지는 끝없이 달리는 시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지만 그런 시기를 지나면 영적인 사람은 평화를 내뿜으며, 그 존재만으로 다른 사람들도 고요하게 만든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정점에 도달하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그곳에 관해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거기 도달하기 위한 갖가지 좌법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매우 쉬운 일이기도 하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계속 넘어지다가 일단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넘어지려고 해도 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中



4. 우리는 어떻게 예술가가 되는가 


이처럼 예술의 경지가 되어버린 그림과 명상, 그리고 달리기와 독서는 모두 '통합'이라는 효과를 얻는다. 또한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세상은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게 되는 데에만 지나치게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타게 된 후의 이야기다. 분명 삶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목적은 아닌 것이다. 행복을 목적으로 두지 않아야 한다. 행복은 언제나 부산물이요, 결국은 어디론가 나아가는 무한한 과정이 삶인 셈이다. 즉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때, 그저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나아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목적을 다하고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빅터 프랭클 



하지만 특별한 경험을 한 러너조차 오랜 방랑의 시기를 겪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다가 아닐 거야’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린다. 그래서 그대는 신성을 놓치는 것이다. 신성은 이미 그대가 가진 것이므로 그대는 그것에 흥미를 느낄 리가 없다.”  - 오쇼



우리는 이미 결승선에, 목적에 도달했다. 그것은 하나의 상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린다. 그렇게 눈을 돌리는 순간 행복이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설정한 결승선에 도착하면 결국 얻는 것은 이미 예전에 얻었던 바로 그 기쁨의 섬광일 뿐이다. 그들은 더 깊은 공허함에 빠진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선다. 아직도 자신이 가진 것이 전부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늘나라 전체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걸 찾기 위해서는 바깥에 있는 것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 조지프 캠벨 



이것을 조지프 캠벨은 ‘통합’이라고 부른다. 진지한 러너, 진지한 독서가, 이들은 모두 희열, 지복, 살아있음을 느끼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일상에는 아직 행복이 온전하지 않다. 아직은 달리기에서만, 독서에서만 행복을 느낄 뿐이다. 그들은 분명 달리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만족한다. 마음을 따라갈 용기가 충만하다. 하지만 달리기를 멈추면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달리기를 할 때 경험한 그것을 이제 일상 전체에 녹여내야 한다. 


이들에게 이제 모든 일상이 ‘신과의 합일’이 되기 위한 통합의 과정이 남아 있다. 통합의 과정은 모든 것에 공감하는 경지를 포함한다. 이때부터 한 인간은 예술가로서 면모를 갖춘다. 고대 그리스의 이상은 ‘모든 일에 탁월함’이었으며, 로버트 헨리는 그의 저서 <예술의 정신>을 “예술이란 어떤 일이든 잘 해낸다는 개념”이라고 선언하며 시작했다. 예술가는 어떤 일이든 탁월하게 해내려고 한다. 


애플이 매킨토시를 만들 때였다. 엔지니어들이 잡스에게 대체 왜 본체 안의 디자인을 신경 쓰냐며 타박하였다. “중요한 건 그게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 하는 겁니다. PC 회로 기판을 들여다볼 소비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술가 스티브 잡스는 그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훌륭한 목수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장롱 뒤쪽에 저급한 나무를 쓰지 않아.”


 잡스의 아버지 폴 잡스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잡스는 회상했다. “아버지는 일을 ‘제대로’ 하는 걸 철칙으로 여기셨지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쓰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왜?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목수 자신은 알기 때문에 뒤쪽에도 아름다운 나무를 써야 하지요.” - 스티브 잡스 


자기 자신은 알기 때문이다. 



“경쟁자를 이기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약속입니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탁월한 노력을 이어나간다. 달리기의 예술가 프리폰테인은 “달리기는 예술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이키의 캠페인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해주고 있다. 


나이키는 한편으로 일종의 안심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봐 스포츠맨, 걱정하지 마.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품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란 셈이지. 나는 나와 같은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멈추지 않을 거야.’ 


그러나 아직 특별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자들, 혹은 특별한 경험에 관한 감은 잡았지만 통합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단 한 문장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리고 사랑이 가슴 아프게 끝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사실 ‘사랑받았던 나’보다 ‘누군가를 절절하게 사랑했던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본 적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꼭 사람을 향한 사랑, 불타는 설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큼이 우리의 행복이다. 그렇다면 최고봉은 무엇인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사랑하라.’ 이거야말로 결승선이 없는 일이다. 끝없는 목표이자, 과정이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서나 사랑과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처음에는 억지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마치 억지로 책을 고르고 읽듯이. 마치 억지로 달리기를 하듯이, 사랑이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경험을 한 러너가 어느 순간부터 달려지듯이, 독서가가 책의 흐름을 타듯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는 다만 사랑할 뿐이다. (...) 그 일이 일어날 뿐이다. 일어나는 것이지 행하는 것이 아니다." - 오쇼  



5. 방랑자의 장미



카타기리가 말한 것처럼 정점에 다다르려면 “지난한 삶의 노력과 그 순간을 움직이는 우연성이 뒷받침되어야”한다. 그 시기를 우리는 ‘방랑의 시기’라고 부른다. 모든 영웅들은 방랑의 시기를 겪는다. 하지만 이것은 방황과는 다르다. 방황은 산송장의 것이라면, 영웅의 방랑은 거대한 심연 속에서도 ‘살아있음’이 있다. 그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갈 용기를 갖추고 있다. 그들이 방향성과 명확한 목표를 갖추고 있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지만, 그들은 대신 ‘살아있음’이라는 느낌을 나침반 삼아 여행한다.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심지어는 다른 이들보다도 더 예민한 성격 탓에 그것을 찾는 것에 더 많은 고통을 느끼지만 자신이 전념해야 할 일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 집중한다. 그들은 삶에 귀를 기울이는 방랑자다. 


방랑자들은 모두 젊은 시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인생 전체를 한 번에 지켜보는 독자들은 마치 길이 처음부터 명확해 보이곤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이 ‘이걸 반드시 해야만 해’라는 주변의 목소리를 따라 나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희열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네가 장미에게 쏟은 시간이 너의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거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을 영원히 책임져야 해. 너는 너의 장미에게 책임이 있어.” - <어린 왕자> 中



이를 통해 우리는 방랑이 가진 의의를 알 수 있다. 방랑의 시간과 깊이가 그들이 쏟는 무언가를 소중하게 만든다. 방랑자들은 모두 장미를 손에 잡고 있지만, 장미의 소중함은 그들이 쏟는 살아있음과 비례한다. 따라서 이미 신발에 무한한 애정이 있어 보이는 필 나이트가, 마치 당연하게도 나이키를 창업했을 것 같은 필 나이트가, 이미 일본에서 신발을 가져와 그것을 미국에서 팔아야겠다는 계획을 세운 그가 여행에서 돌아와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이유는, 아직 블루 리본(나이키의 전신)에 애정을 쏟은 시간이 적기 때문이다. 


필 나이트는 왜 달려야 했을까? 처음엔 당연히 목적이 있었을 터. 하지만 점점 달리기 자체에서 살아있음을 느꼈기에 달렸을 뿐이다. 그리고 달리기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았기 때문에 그에겐 소중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대안이 없어진다. 이게 아니면 뭘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만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버린다. 다행히도 필 나이트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기 때문에 달리기와 스포츠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슈독>이 될 수 있었다. 


조지프 캠벨은 왜 신화에 관한 책을 읽어야 했을까?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 흥미 덕분에 신화에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을 수 있었고, 신화는 캠벨의 장미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지프 캠벨은 신화와 인디언 문화를 섭렵했기에 영웅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목적과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책만 읽었던 5년간의 시기가 없었다면? 


조지프 캠벨도, 필 나이트도 모두 인생의 어느 시기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살아있음'을 나침반 삼아 끝없는 방랑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착했고, 전념했다.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천직을 찾아야 한다면 일단 '무엇'에 집중하기보다도 '살아있음'이라는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 


"천직을 찾으라.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계속 찾도록 하라. 천직을 찾으면 힘든 일도 참을 수 있고, 낙심하더라도 금방 떨쳐 버릴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성공에 이르면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필 나이트 


천직을 찾고 성공에 이르면 전혀 다른 기분을 느낀다. 사실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는 곳으로 따라가야 천직을 찾는 것도 사실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곳으로 데려다 줄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언제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당신은 방황하고 있는가, 방랑하고 있는가? 장미에게 시간을 쏟고 있는가? 아니면 장미를 눈앞에 두고도 ‘이건 나의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는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면 살아있음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라. 그 느낌이 당신을 모든 곳으로 데려다 줄 그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면 어떤 일이든 그것을 사랑하라. 결승선은 없다. 




“결승선은 없다.” 


조만간 진지한 러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당신을 높은 의식 상태로 몰아넣는 

새로운 종류의 신비로운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기쁨의 섬광

달릴 때 떠다니는 느낌. 


그 경험은 우리 모두 저마다에게

독특한 것이지만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당신을 평범한 러너들과 

분리하는 장벽을 부수게 됩니다. 


영원히. 


그리고 그 시점부터, 

결승선이라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당신을 위해 달리는 것이죠. 


당신은 달리기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것에 

푹 빠지기 시작합니다. 


나이키는 그 느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에게도 결승선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년 점점 더 나은 운동화를 만들기 위해 

탁월한 노력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경쟁자를 이기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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