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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Jul 25. 2024

지각 5분 전, 나는 아직 버스에 있다.

지각 5분 전, 나는 아직 버스에 있다. 버스기사는 조급한 내 마음도 모르고 모든 신호등에 걸리고 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늦을 것이 분명했다. 10분 일찍 나왔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부질없다. 이미 나는 10분 늦게 나왔지 않은가. 아니, 10분 늦게 나온 게 아니라 제시간에 나왔다. 이 빌어먹을 버스가 느릴 뿐이다.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험한 말들을 속으로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웃어버렸다. 미친 사람처럼. 물론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지는 않았다. 피식. 피식 정도였다. 그러나 나에겐 붓다의 꽃을 본 마하가섭처럼 우주적인 웃음이었다. 


나의 분노는 버스의 엑셀을 대신 밟아주지 않는다. 신호도 바꾸지 못한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재촉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화를 내고 있다. 왜? 




아무래도 감정은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뀔 거라 믿는 모양이다. 답답해하면 답답한 상황이 풀릴 거라 믿는 모양이다. 불안해하면 불안한 상황이 해결될 거라 믿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달라지는 건 내 감정 밖에 없다. 


흐르는 강물처럼 감정은 그저 흐른다. 우리는 강물의 흐름을 막으려 들지 않는다. 아니, 흐름을 막으려 들기도 한다. 댐이 있지 않은가. 댐은 흐름을 막는다. 우리의 내면에도 댐이 있다. 저항이 그것이다. 우리는 감정에 저항한다. 화가 나지만 화를 내려하지 않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참는다. 그런데 왜? 왜 그래야 할까.


댐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댐은 물을 저장한다. 댐은 물을 정화한다. 유용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저항은 감정을 저장해 놓고 정화는 절대 해주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고여서 썩을 뿐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신이 무언가에 의해 화가 났다면, 그것은 무언가의 탓이 아니라고. 내 안에 억눌려 있던 화가 무언가를 핑계로 터져 나올 뿐이라고. 나는 그것을 읽으며 '그럼 결국 '무언가의 탓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무언가만 아니었으면 그 화가 터져 나올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 안에 화가 쌓여 있는 건 사실이다. 언젠가 터져야 할 녀석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터트리기는커녕, 또다시 버스라는 좁은 공간에서 감정을 저장하고 있다.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각자의 사연이 보인다. 아니, 각자의 감정이 보인다. 치열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문득 어린아이가 카페에 오면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이 든다. 감정이 하나도 쌓여 있지 않고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네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적으로 있는 것이야 맞겠지만, 뭐랄까, 그동안 살면서 겪어온 감정들에 겁이 질린 듯한 느낌이 든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기에, 혹은 내가 그런 사람이기에 모두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감정이 너무 무서워서, 다들 각자만의 트라우마가 있기에 감정을 저장한다. 듣기만 하면 웃기지 않은가. 감정이 무서워서 감정을 저장한다니. 도대체 누가 무서워하는 걸 저장하는가? 악취미도 그런 악취미가 따로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전혀 몰랐던 세상에 관하여 듣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다르구나, 내가 아직도 모르는 세상이 있구나 하며 놀라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모두 똑같이 힘들어하고, 똑같이 화를 내고, 똑같이 기뻐하며, 똑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꿈이란 행복, 영원한 행복. 


그러나 영원한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매일 웃기만 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웃음과 울음에 저항하지 않는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영원히 모든 것이 평화롭고 고요한. 그것이 영원한 행복에 가까울 것이다. 명상뿐만 아니라 무언가에 몰입할 때,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때도 모두 그 순간엔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지 않는다. 이완되어 있다. 그래서 제대로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의 호흡을 측정하면 기계는 잠에 든 것으로 착각해 버린다. 잠에 들지 않았지만, 잠에 들지 않은 경지. 여여하다. 그걸 전문용어로 '존재한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 영원한 행복이란 존재함이겠다. 그 말은 반대로 감정을 댐으로 막고 있는 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이 댐에 막히면 산송장이 되어버린다. 나는 산송장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절대. 


다시 정신을 차린다. 나는 여전히 버스에 있다. 그리고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아니, 화는 멈췄다. 하지만 선풍기를 꺼도 아주 잠시동안은 날개가 돌아가는 것처럼 화가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린 모두 이상한 악취미 때문에 불필요한 불행을 감수하고 있다. 나는 아마 지각한 덕분에 점수가 좀 떨어질 수도 있다. 사소한 1점 하나로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덕분에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런 화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면, 화가 나도 저장해놓지 않을 수 있다면 성적은 좀 떨어질지언정 불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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