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인생 수업

by 보로미의 김정훈

나는 복주라는 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모든 것은 완전하다는 이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한 늙은 꼽추가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는 꼽추입니다.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복주는 말했다.

“나는 평생 자네처럼 완벽한 꼽추를 본 적이 없네.”

- osho




“인생 수업에는 행복하라는 숙제뿐” - 류시화



인생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르침을 주곤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라는 숙제를 잘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그런 가르침 말이죠. 최근에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저는 한 카페에 갔습니다. 카페에는 작은 책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공간에 책을 놓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인생책’들은 제가 가장 눈길을 많이 주는 책장에 꽂아두곤 하죠.


책장에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 수업>이 있었습니다. 분명 2~3년 전 즈음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읽어놓고 이렇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책은 거의 없는데 뭐지, 싶은 마음에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인생 수업에는 행복하라는 숙제뿐’이라는 류시화 작가님의 글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 페이지쯤 읽자마자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장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카페 사장님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드려 책을 잠시 빌려가도 되겠냐고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사장님께 빌려 읽을 거면 차라리 카페에 매일 와서 읽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읽고 싶을 때, 특히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읽는 것이 좋아서, 그리고 이런 책일수록 밑줄을 치면서 읽기 때문에 사서 읽기로 했습니다.


요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에 재미가 들려 검색해 보니 거의 모든 지점(어쩌면 정말로 모든 지점)에 재고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지점에도 최소 4개씩 있었죠. 최근에 찾는 책마다 재고를 찾기가 어려웠던 터라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매장에 가보니 책들이 모두 비닐에 씌워져 있어서 상태를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중 한 권을 가져가 직원분에게 여쭤보니 비닐을 벗겨줄 수 있다며 안 사게 되면 다시 비닐을 씌워야 하니까 말씀해 달라고 하더군요. 알겠다고 답하고 책을 돌려받아 확인해 보니 앞표지가 찢어져 생긴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매장에 있는 책 4권의 상태를 모두 비교하며 사고 싶었지만, 모두 까달라고 하기에는 눈치도 보이고 해서 다른 책들은 굳이 보지 않고 그냥 처음 골랐던, 구멍난 책을 사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이 매장에 있는 재고 모두 같은 상태(‘중’, ‘상’, ‘최상’ 중에서 ‘중’)였기 때문에 각자만의 하자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고 나갈 때 찝찝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책을 사들고 온 다음 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챕터를 읽을 즈음에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사랑스러워 제 인생책이 될 것만 같았는데, 찢어진 중고책으로는 책장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독서를 멈추고 새 책을 사서 읽고 싶어 졌죠.


이 생각이 끝날 때쯤 부끄러움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 방금의 생각을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읽고 있던 부분이 조건 없는 사랑, 있는 그대로의 사랑에 관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건 없는 사랑에 관하여 감동하면서도 책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 될 수 없다며 조건적인 사랑을 주었습니다.


문득 최근에 있었던 또 다른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사기 위해 교보문고에 미리 ‘바로드림’을 신청해서 서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기 직전에 교보문고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책 앞표지가 조금 찢어졌는데, 매장에 재고가 1개밖에 없다, 그래서 새 상품을 주문하려면 며칠 걸리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저는 얼마나 찢어졌냐고 물어보았고, 직원분은 5mm 정도 찢어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게 어느 정도인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아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서점으로 가는 버스에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책 주문했는데 옆표지가 5mm 정도 찢어졌다네. 이걸 사 말아?”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해. 책도 많이 우울해하고 있을 거 같은데 그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로 가는구먼.”


저는 아주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부끄러움도 느꼈죠. 뭐랄까, 머리에 뿅망치를 뾱하고 맞은 기분이랄까요? 친구에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그보다도 책도 우울해하고 있을 거라고 하니 뭔가 제가 사지 않으면 그 누구도 사지 않을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 책을 꼭 내가 사주고 싶었습니다.


방금까지는 하필 찢어진 책밖에 없다는 게 영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 책을 내가 사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원효대사 해골물’,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가슴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구멍 난 <인생 수업>을 나의 인생책으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인생책보다도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방금의 못된 마음을 사과하기 위하여, 또 인생 수업의 숙제를 하기 위해, 저는 새 <인생 수업>을 사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제가 구멍 난 인생 수업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과의 방법이자 확실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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