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까지 내 인생을 살아온 적이 있었나?

20살의 나에게 5

by 보로미의 김정훈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은 점점 바래져 가지만,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 가는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반친구가 어떤 잘못을 하고(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께 혼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반의 분위기는 냉랭했고, 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죠. 친구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세상 억울한 사람처럼 울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혼나고 있는 친구보다 더 심하게 울었다는 것이죠. 주변에 앉은 친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왜 울어?' 저도 왜 우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슬프니까 우는 거지. 우는 데 이유 있나. 이유가 있다면 선생님의 분노와 친구의 슬픈 감정을 제가 흡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남의 감정을 흡수합니다. 앞사람이 화를 내면 화가 나고, 친구가 슬퍼하면 슬퍼하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뇌에 거울뉴런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뉴런은 쉽게 설명하면 남이 하는 행동을 보기만 해도 뇌가 마치 자기 자신이 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죠.



헌데 저는 그 정도가 조금 심했습니다. 저는 같이 있는 친구들이 모두 행복해야 그제야 행복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불편한 티를 내면 저는 거기서 그 불편한 티를 내는 친구보다도 더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밖에선 항상 의식하지 않아도 온몸에 긴장이 가득하고, 눈치가 참 빠릅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구나 다 이렇기 때문에, 이것이 나만의 특성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숱한 경험과 여러 책을 읽다 보니 이 특성이 다른 사람보다 더 두드러지는 '재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민감합니다. 물론 지인들은 제가 예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지금은 예전보다 민감함을 다룰 줄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가면을 썼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20살에 저는 매일같이 가면을 썼습니다. 행복이라는 가면. 전혀 행복하지 않았지만 항상 웃었고 긍정적인 것처럼 굴었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술집을 옮기기 바로 직전 대화 주제는 인생에 대한 푸념이었습니다. 모두가 인생이 쉽지 않다는 말들을 하고 있었죠. 힘이 든다느니, 고민이 많다느니 하는데 저는 별 말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때만 해도 제 고민을 잘 털어놓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같이 다 푸념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듯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도 힘들다고 말이죠. 그러자 한 친구가 믿지 못하겠는 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힘들다고?' 전 기가 차서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힘들지..' 그리고 친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난 네가 항상 웃고 있으니까 행복한 줄 알았어" 그때만큼 비참한 적이 없었습니다.



호구였습니다. 22살 전까지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꿈을, 인생을, 심지어는 감정까지도 대신 살아주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내 인생을 주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고, 남에게 내 인생을 다 내어주는 것과 남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너무 힘들어서 거절하면, 남들은 제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들은 만족하지 못하면 '네가 무슨 남을 위해 사느냐'라고 말하고, 저는 그런 질타에 미안함을 느껴 더 남을 위해 사는 악순환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거절을 못했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다 좋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해' 인간이죠. 남들이 하자고 했는데 나부터 생각하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시간과 감정을 내던지고 남들의 부탁을 들어줬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먼저 내 인생에게서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휘둘리며 살았죠. 남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속상하게도, 내가 아무리 날 제쳐놓고 도와주면,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은 왜 이젠 도와주지 않느냐고 되려 화를 냅니다. 그들은 나에게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말하죠.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1순위로 생각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사실은 자신을 전혀 사랑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남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더 열심히 도와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속에선 분명히 뭔가 꼬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땐 그게 뭔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남들은 다 싫다는 입대를 하자마자 저는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날 챙길 여유가 생겼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생각하니, 날 돌보지 못한 것이 나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울함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입대 후 한 달이 지나고 첫 야간 작전이었습니다. 신병으로서 처음 근무에 동참했습니다. 초소 근무였는데, 이 근무만큼 깊은 얘기를 나누기 좋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선임, 동기와 지난 인생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아주 잠깐 정적이 찾아왔고 불현듯 강렬한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그동안 내 인생을 남에게 다 내어주고 살아왔구나. 난 지금까지 내 인생을 살아온 적이 있었나?'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꼭 군대에서 나가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용기를 내서 내 인생을 살아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뒤로 내가 가끔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속에서 정말 견딜 수 없이 베베 꼬이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이 깨달음 덕분에 이 느낌이 내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는 신호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내가 거절의 표시를 하면, 친구들은 비정하다고 반응합니다. 당연한 반응이고 저는 사실 고마움의 감정이 더 큽니다. 그들은 나를 불러주었고,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기대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저는 조금 단호하게 말합니다. '난 너에게 No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나에게 Yes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너무 속상해하지 마.' 상대방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나에게 무한한 Yes라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거절이 쉬워집니다. 그것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안한 감정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미안해하면 됩니다. 함께 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감정. 그 감정을 그저 느끼면 됩니다. 미안함을 문제라 생각하지 말고, 미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조금 아픈 마음이 들겠지만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면 또 느낄만합니다. 왜냐하면 그 또한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20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입니다. 너의 민감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재능을 받아들여라. 너 스스로를 먼저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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