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의 나에게 4
미시사회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어빙 고프만은 저에게 재미난 생각을 선물했습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사회학 강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정신 병원이나 수용소 등을 참여 연구한 것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고프만은 정신병원이나 수용소와 같은 공간을 '총체적 기관'이라고 정의합니다. 총체적 기관이란 특정 목적을 갖고 바깥 사회와 단절된 채 구성원을 동일한 권위로 대하며 그들이 일을 하는 공간입니다. 쉬운 말로, 정신병원에 들어온 사람은 그때부터 '정신병 환자'로 정의되고 정의된 이름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그에 맞는 행위를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정의로 인해 환자 개개인의 자아는 '박탈'당하고 '정신병 환자'라는 자아만이 남는 셈이죠.
이런 어빙 고프만의 연구를 읽으며 든 생각은 정신병이 어느 정도 특정 누군가가 정의 내려버리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정신병원과 수용소와 같이 작은 공동체를 연구했지만, 이 미시적인 연구는 거시적 사회를 관통합니다. 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정의 내려진 '정신병'은 과연 과거에도 '병'이었을까? 그리고 그 병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정말로 '정신병자'였을까? '정신병 환자'라는 정의가 그들을 진짜 정신병에 갇히도록 부추긴 건 아닐까? 우리가 '문제'라고 정의 내리는 그것이 과연 진짜 문제일까? 우리가 그저 편하려고 분류해 버린 건 아닐까? 사회학에 대해 아는 건 쥐뿔도 없지만,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제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무언가를 '정의'내리는 것에 굉장한 불쾌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번아웃'이 그랬죠. 종종 친구들이 '번아웃이 왔다'고 말했지만, 저는 도대체가 그 번아웃이 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번아웃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번아웃의 대표적인 증상을 말해주곤 하지만, 그래서 그 '번아웃'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아웃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었죠. 물론 번아웃의 증상은 충분히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번아웃이라 정의 내리고 '번아웃이 왔다'고 생각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정의를 내리면 그 정의 안에 갇히게 됩니다. 번아웃이 온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고, 그렇게 대우받고 싶어 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증상들이 안에서 고여 썩게 됩니다. 저도 어쩌면 고등학생 때 공부를 하다가 번아웃이 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정의를 싫어했고, 번아웃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번아웃 증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찾아왔을 때도 '번아웃'이라고 판단하지 않았고, 그런 증상은 그렇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학생 내내 번아웃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소신발언을 하자면, '자존감'이라는 단어도 제가 불쾌해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자존감이 낮다'고 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항상 친구들에게 '나는 자존감이 낮아'라고 말하는 이들은 정말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특징'을 보일뿐더러, 그런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특징을 보이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저도 자존감이 낮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당시엔 '자존감이 낮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는 어쩌면 자존감이 좀 낮았던 거 같아'라고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런 개념을 믿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회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친구들이 저에게 '어떻게 자존감을 높일 수 있냐'고 물을 때마다, 저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믿지마'라고 답합니다. 자존감이 낮다는 프레임 속에 갇히면 그 안에서 빠져나오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내린 정의를 닮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은 자기 스스로 어떤 그림을 그린 다음 그 그림을 닮으려고 하는 피조물이다.
- <두 번째 산> 中
나를 정의하는 말이 있을 때, 그것이 나를 어떤 답답한 감옥 안에 가두면 그것은 <프레임>이 되고,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진짜 내게 필요한 <정의>입니다. 최소한 자존감이 낮다는 말, 번아웃이 왔다는 말은 우리에게 좋은 정의가 아닙니다. 프레임은 인생이 자연스레 흘러갈 수 있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마치 잘 흘러가는 강에 돌을 쌓아버려 물이 고여 썩은 물이 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직접 박았던 돌을 빼는 일입니다.
요즘 시국에 새로 생긴 프레임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MBTI가 인사치레가 되면서 '기 빨린다'는 말이 버릇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약속을 가든 '나 기빨릴 거 같아'라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만 지쳐도 '기 빨려'라고 생각하며, 뭘 하려고만 해도 '기빨릴 거 같아서 싫어'라고 말하며 원래 경험할 것보다 더 부정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만약 이들이 '기 빨린다'는 단어와 문장을 몰랐다면 기 빨린다는 것에 그렇게 종속당했을까요? 분명히 그 문장이 유행하기 전부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 빨림'을 경험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 빨림을 경험하는 것과 그것을 말로 표현하여 정의 내리는 것은 다릅니다. 자기 자신을 프레임 속에 가둬두었으니요.
같은 증상을 겪고 있어도, 그것을 정의 내리느냐, 아니면 그저 경험하느냐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넌 번아웃 안 와? 넌 콤플렉스 없어?'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해도 좋습니다. '난 그런 거 안 키워.' 자기 판단을 하지 않고, 나를 어떤 정의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이 변화의 시기를 보낼 때 가장 중요한 마인드라고 생각합니다.
힘들 때 힘내라는 말만큼 무력한 위로가 없습니다. 그럴 땐 차라리 '힘들다'는 정의를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힘듦을 그저 맛보고 경험할 일이지, 그것을 '힘들다'고 말하고 정의하면 '힘든 사람'이라는 정의 안에 갇혀서 그것을 닮고 증명하려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말이죠. 그러니 힘듦을 경험하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게 놔두면 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러니 저는 20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입니다. 조급함도, 방황도, 그 외에 날 스쳐가는 모든 감정과 정념도, 모두 흐르는 강물처럼 흘려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