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내가 아니다

20살의 나에게 3

by 보로미의 김정훈

지금까지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백이면 백, 모든 친구들이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먼저 친구들에게 연인과 크게 싸웠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왜 그렇게 싸웠냐고 물어봅니다. 그럼 친구들은 보통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크게 화를 냈었다는 건 기억이 난다고 하죠.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나중엔 감정마저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린 그런 존재입니다.



2020년 7월, 코로나가 한창이었습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나갈 수 있었던 휴가가 끊긴 지도 5개월이 넘었죠. 휴가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습니다. 점점 휴가일수가 근육량처럼 비대해져 가자, 소대장님은 동기들과 나를 모두 무려 14일짜리 휴가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휴가를 조건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공문이 내려왔고, 저는 찝찝하면서도 설레는 휴가를 나갔습니다. 찝찝했던 이유는, 휴가 청산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기들과 저는 매일같이 휴가를 쓰지 않고 모아두면 일찍 전역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산역에 내리자마자 입대 전에 썼던 자취방으로 달려갔고, 짐을 풀자마자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며칠 전에 전역한 선임과의 전화였습니다. 금방 전화를 받은 형은 너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제게 지금까지 잊히질 않는 말을 했습니다.

'정훈아, 나는 군대를 안 갔다 온 거 같아. 입대 전에서 지금으로 건너뛴 거 같아. 군생활 다 까먹었어.'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이 힘든 군생활이 어떻게 까먹어지냐고, 말도 안 된다고 대답하며, 그렇게 전화는 끝났습니다. 그렇게 형과의 전화를 잊고 휴가를 보낸 지 벌써 7일 차가 되었고, 저는 여전히 휴가가 7일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제주 본가로 내려갔고, 9일 차가 되었습니다.



<데일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들고 집 앞 스타벅스로 갔습니다. 2시간 동안 책을 읽고 경치를 바라보며 참으로 멋진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집 앞 스타벅스는 훌륭한 통창 오션뷰입니다.) 슬슬 독서가 지치다고 생각할 때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밥 먹으러 집에 오라는 전화였죠. 저는 짐을 싸고 집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마치 고등학생 때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나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재밌어하고 있었죠.



그때였습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제 머릿속에 확 하고 스쳐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입대 전날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건너뛴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모든 기억이 사라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군생활을 모두 잊었습니다. 휴가를 9일이나 나온 탓이었을까요? 사회가 너무 익숙해지면서 선임이 말한 바로 그 경험, 군대 다 까먹고 입대 전에서 지금으로 건너뛴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9개월의 군생활이 순간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군생활을 떠올리려 하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바로 다음 날, 저는 다시 한번 그 느낌을 상기해보려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 느낌이 달랐습니다. 분명 9개월을 건너뛴 듯한 느낌은 여전했지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떠올리려 하면 많은 부분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든 감정의 기억은 명확했습니다. 분노하고 짜증 내고 우울하고 화냈던 그 감정들만 기억이 났습니다. 정말 찝찝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전역하고 나서도 이렇다면,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감정 낭비는 하지 말자. 그저 흐르게 내버려 두자. 그럼 나중엔 감정도 기억나지 않으리라. 저는 실제로 휴가에서 복귀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감정 소모가 손에 꼽도록 지냈죠. 그러자 부정적인 감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남은 9개월의 기억은 행복하게 남아있습니다. 전역하고 다시 만난 친구들은 모두 나를 '그럴 수 있지 man'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제가 항상 '그럴 수 있지'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저는 9개월의 군생활을 감정 낭비 없이 여유롭고 평온하게 지냈습니다. 친구들이 '현자'라고 부를 만큼.



저는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나 화났어'가 아니라 '화가 잠시 찾아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020년에 처음으로 감정과 나를 분리시킨 겁니다. 전 그전까지 항상 감정과 나는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에 끌려다녔습니다. 지금은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스토아철학에선 처음 찾아오는 감정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순간적으로 질투나 화, 두려움과 조급함을 느낀다면 그건 가짜라는 거죠. 금방 사라지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하지만 우린 본능적으로 찾아온 감정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감정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비단 감정뿐만이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죠. 자아의 지껄임을 우리는 나의 생각이라고 받아들여서 본능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됩니다.



방법은 하나, 그냥 지켜보면 됩니다. 본능적으로 찾아온 감정과 생각은 90초를 넘기지 못합니다.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알아서 흘러갑니다.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것을 그렇지 못하게 막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감정이 '들쑥날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온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놓아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기분이 안 좋다가도 행복한 감정이 들면 그 감정도 붙잡아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거죠. 저의 20살이 그랬습니다.



20살의 기억도 지금은 모두 바래졌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힘듦입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만 기억이 납니다. 만약 제가 2020년 7월의 깨달음을 미리 알았다면,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그저 모든 감정과 일을 즐길 수 있었다면 저는 어떤 감정과 고민도 고여있지 않은 채로 흘러갔을 겁니다. 감정과 나는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찾아온 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해도 스무 살의 인생은 참으로 편안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20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입니다. 감정과 나를 같은 것으로 보지 말고, 그 감정에 다이빙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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