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을 즐겨라

20살의 나에게 2

by 보로미의 김정훈

저는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어갈 때도 소설을 3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죠. 교훈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나마 읽은 소설도 <싯다르타>, <파우스트>와 같이 나름대로 그 속에서 배울만한 것이 명확한 소설이었어요.



내가 깨달은 것은 이거야. 나는 상황을 머릿속에 내가 그린 것들과 비교했어. 그리고 매번 상상한 것과 현실이 다르다고 힘들어했지. 하지만 내가 상상한 완벽한 세상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필요했던 거야. - <싯다르타> 中



가끔 편식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소설을 도전해 보지만 그럴 때마다 소설은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설이 나에게 '어디 한번 찾아보시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요. 그땐 왜 그런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책 한 권에서 소중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저서 <읽다>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담 보바리>를 쓴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요. 플로베르는 한 통의 편지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내가 볼 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가 실천에 옮겨보고 싶은 바로 무에 관한 한 권의 책, 외부 세계와의 접착점이 없는 한 권이 책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권의 책 말이다.



그는 이런 포부를 담아 불후의 고전 <마담 보바리>를 썼습니다. 마담 보바리를 읽어보면 그 주제를 명확히 하기도 어렵거니와, 줄거리마저 신통방통할만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마담 보바리의 줄거리를 <젊은 주부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프랑스의 지방 도시에서 비소를 음독하고 사망>이라고 단 한 문장으로 익살스럽게 요약했습니다. 즉, 줄거리를 요약하려고만 하면 너무나 간단하게 요약가능한,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소설인 셈이죠.



하지만 독자는 끊임없이 <마담 보바리>의 주제의식과 교훈, 의미를 찾으려 듭니다. 지금껏 마담 보바리를 읽은 수많은 작가가 그러했고, 김영하 작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 소설이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독자는 여전히 뚜렷한 교훈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결국 소설은 주인공이 '비소를 음독하고 사망'하며 끝이 납니다. 그때쯤이면 독자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죠.



알랭 드 보통의 요약을 빌리자면 우리는 그저 젊은 주부의 일대기를 보기 위해 이 책을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교훈의 전부일까요? 플로베르는 그럼에도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의도라 함은, 교훈을 담아 찾기만 하면 되었던 그동안의 소설이 아닌 교훈을 찾아다니는 '여정'을 중요시했다는 겁니다. 플로베르는 교훈이 있어야 하는 소설을 거부했습니다.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는 주제와 교훈을 강조하는 소설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주제를 찾아낸 것 같기도 하고, '중심부'를 열심히 찾아 헤매다 얼추 비슷한 곳에 당도한 것도 같은데, 막상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니었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것이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저는 크게 웃었습니다. 정말 크게 웃었죠. 문장이 웃겨서가 아니었습니다.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의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동시에 '소설'이라는 단어가 '인생'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것이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방랑하고 방황하기 위해서다.



이 문장은 제게 인생의 본질이 '불확실함'임을, 헤매는 것이 바로 인생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확실함'을 갈망했습니다. 내가 방황하는 이유, 내 인생이 못난 이유는 모두 '확실한 답'의 부재라고 믿었어요. 내 미래에 대한 확실함.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에 관한 확실함. 헤매는 건 언제나 잘못된 상태라고 생각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저는 분명 더 단단해져 갔습니다. 불확실함에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파도가 강하게 칠 때 흔들리지 않고 무언가를 단단히 붙잡아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이 무색하게 파도에 쓰러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여전히 완전한 해답을 찾지 못해서 그렇구나 하며 또다시 답을 찾아 나섰죠. 그리고 저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불안정의 파도를 타는 서퍼가 되는 과정은 몸을 키우듯 정신과 체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을 빼고 내려놓는 것이다.' 서퍼는 인생의 본질이 불확실함임을 깨닫고 그것에 온전히 나를 맡기는 사람입니다. 불확실함에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뒤로 참 많은 책에서 이와 비슷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삶의 본질은 불확실함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것을 확실한 것으로 만드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요.



저는 불안과 방황을 항상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방황과 불안은 다르고, 불확실함과 불안은 다릅니다. 불확실하면서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불확실한 세계에서 그저 헤매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깨달음만 있다면요.



과거의 저는 방황하고 있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 언저리에서 베베 꼬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방황이 문제라고 여겨 부끄러웠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오히려 어떠한 불확실함도 없을 때, 무언가에 안주하고 그저 평온하기만 할 때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방황은 문제가 아닙니다. 방황은 인생입니다. 방황을 문제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저는 20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입니다. 방황을 즐겨라. 방황하는 한 너는 살아 있다. 너는 지금 그 누구보다 살아있다. 생생하게.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에 대해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 좋게 헤매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좋은 인생이란 모든 해답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 좋게 헤매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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