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조급해하라

20살의 나에게 1

by 보로미의 김정훈

친구들과 연애 얘기를 할 때마다 늘 빠짐없이 오가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이상형이 뭐야?'



예전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대답을 했습니다. '대화가 잘 통했으면 좋겠고 키는 이 정도면 좋겠고..' 하지만 요즘 누군가 저에게 이상형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난 이상형을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이상형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내 이상형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내 내면이 어리숙할수록 연인을 내 이상형이라는 틀 안에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그럼 당연하게도 상대방은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불만이 쌓입니다.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애써 포장하며 연인을 내 이상형에 맞게 바꾸려 듭니다.



종종 어떤 이들은 '이상형은 그저 이상형이고 막상 연애하면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전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해도 정말로 그런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형이 머릿속에 있는 이상 그 생각은 어찌 됐든 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제 개똥철학입니다.



이상형이 생겼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조급해진다는 겁니다. 이는 비단 연인과의 관계만이 아닌데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이상향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조급해합니다. 조급함의 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보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생각이 조급함을 만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에 따르면, 우리는 이상향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지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아직 경험으로 배운 진리가 아니기에,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상향을 버리라는 말을 제 입으로 할 수는 없기에, 아주 긴 구절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제가 경험으로 배워 알려드릴 수 있는 이야기로 넘어갈까 합니다.




아래 구절은 오쇼의 <네 '멋'대로 살아라>에 수록되어 있는 책의 한 부분입니다.


저는 평생 동안 제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는 듯합니다. 저는 늘 똑같습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건가요?


먼저, 그대는 왜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인가? 그대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그대는 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그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은 그대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누가 그대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폭력적인 마음이 비폭력적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비폭력적인 상태가 되어도 폭력은 늘 남기 마련이다.


화난 마음이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는가? 그대는 노력을 통해서 자기 주변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화를 억누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똑같은 마음이다. 화는 이미 존재한다. 화를 깔고 앉아 있을 뿐이다. 마치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마음이 지적인 마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인가? 그런 노력을 기울일수록 어리석음은 더 깊게 뿌리를 내린다.


그렇다면 과연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은 바로 ‘수용’이다. 수용은 마법의 열쇠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바로 그 수용을 통해서 지성이 생겨난다. 왜 수용을 통해서 지성이 생겨나는가? 그대가 수용할 때마다 더 이상 존재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열은 사라진다. 그대 자신과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그대 사이, 그대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그대 사이에 분열이 존재한다. 바로 그곳에 정신분열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저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이제 단 두 가지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자신을 미친 듯이 ‘그런 존재’로 몰고 가거나.. 그것은 마치 개가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고 빙빙 도는 것이나, 양쪽의 신발 끈을 한데로 묶고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그대는 아주 약간만 뛰어오르거나 점프를 할 수 있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소위 그대의 종교인들이 해온 일이다. 두 개의 신발 끈이 하나로 묶인 채로 뛰어오르는 것이다. 아주 잠깐 지면보다 높이 올라가기는 하겠지만 다시 땅에 떨어져 풀썩 자빠지고 만다.


그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분열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대가 노력할수록 자신감과 자존감을 더 많이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약, 알코올, 정치, 돈, 시장 바닥에 빠져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고안해왔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추악한 개념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네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면 그들은 충격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네 자신을 알라.’라고 말해도, 아무도 그 말을 그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경청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는 이미 자신을 역겨운 존재, 추하고 지겹고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결론을 내렸고, 자기 안에 온갖 더러움과 상처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그런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보고 싶겠는가? 그런 상처들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낫다.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면, 과연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는 이 가지, 저 가지를 잘라낼 것이다. 문제는 가지에 있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다. 나뭇가지들을 잘라내면 나무는 더 단단하고 튼튼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무는 더 건강한 이파리들을 무성하게 키워낼 것이고 도전에 대응할 것이다. 그대는 과연 나무를 파괴하고 싶은가? 이파리 하나를 잘라내면 세 개의 이파리가 돋아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가 내놓는 답변이다. 가지 하나를 잘라내면 세 개의 가지가 그곳에서 나온다. 나무는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파리와 가지들을 잘라내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대는 깊은 내면에 똑같이 남는다.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

그대가 속한 미친 사회는 그대에게 오직 두 가지의 대안만을 안겨둔다. 미친 듯이 자신을 계발하도록, 즉 신발 끈을 한데로 묶고 뛰어오르려고 노력하도록 만들거나, 그대가 약간 더 지성적이라면 위선자가 되는 방법뿐이다. 가식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는 행동은 그와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자기 삶에 뒷문을 열어두는 것과 같다. 앞문으로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그래야만 하는 것, 멋진 이상향,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앞모습을 칠해두지만, 뒷문으로는 너무나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분열을 만든다. 그대는 절대로 편해질 수가 없다.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끊임없이 발각되고 만다. 과연 언제까지 가식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대의 이웃들도 가식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모두가 서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대의 가식적인 삶은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뒷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대 역시 뒷문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그대는 증거도 요구하지 않고 곧바로 그것을 믿어버린다. 타인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그 증거를 요구한다. 만약 누군가가 ‘저 성자는 가짜이다. 그는 실제로 성자가 아니다. 사실 그는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살인자이자 방탕아이다.’라고 말하면, 그대는 바로 그 말을 믿어버린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 사람은 진정한 성자이다.’라고 말하면, 그대는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두고 보겠어. 면밀히 검증해 봐야지. 더 자세히 알아보겠어.”


그대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좋다고 그리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의 선량함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타인의 선량함이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관념을 갖게 된다. 사회 전체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


부디 자신을 계발하고 변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그만두어라. 과연 그대는 자신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바꾸려고 하는가? 그대가 다른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과연 누가 결정한단 말인가? 누군가 그대의 존재가 어떠해야 한다고 결정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강요가 될 것이다. 그런 이상향들 때문에 그대는 자연스러운 존재, 단순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러면 그대는 항상 부자연스럽고 제멋대로이고 독단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대는 그 누구를 절대로 모방할 수 없다!


(...) 본질적인 존재가 되어라. 그대가 본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데, 왜 굳이 복사판이 되어야 하는가? 붓다나 예수나 나를 모방하지 말라. 그 누구를 절대 모방하지 말라! 모든 곳에서 배우되 절대로 모방하지는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그대는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그대가 누구인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다. 그대가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 목격하지 않고서 과연 그대는 자신이 누군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존재와 자신을 익숙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대의 내면에 과연 어떤 존재가 기거하고 있는가? 그대를 찾아온 그 손님을 잘 들여다보라. 그대의 육체가 주인이다. 낯선 존재가 그대의 육체 안에 기거하고 있다. 저 너머로부터 온 이방인이 그 육체를 선택하여 거기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대이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명상하고 자각하라.


자신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떨쳐버려라.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신을 아는 데 쏟아 부어라 그대는 바로 그 앎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장이 그대의 진면목을 드러내줄 것이다. 그대는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그대’가 되기만 하면 된다.

- osho, <네 '멋'대로 살아라> 中




다시, 나의 이야기: 조급함은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나다운지 아닌지,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그 이상향이 사회에서 주입한 가짜 이상향일지도 모릅니다. '원하는 모습'을 만든다는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무시하고 짓밟아버리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목표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내가 더 성장하고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막는 행위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조급함이 제대로 가는 과정에서 뇌가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뇌는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른 노력을 할 때,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새로운 신경회로를 형성합니다. 그럼 기존에 있던 신경회로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아니꼽죠. 조금만 생각해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원래 있던 신경회로는 침입자를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조급함'을 내보냅니다.



우리는 그런 조급함과 초조함을 뇌의 의도대로 '두려움'으로 받아들입니다. 덕분에 새로운 행동을 포기하고, 현상태를 유지하려 듭니다.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목표는 여전히 남아 있기에 얼마 후 다시 의지를 불태워 새로운 행동을 시작합니다. 지난번에 포기했던 그 목표를 향해 다시 'Just Do it!' 합니다. 그리고 뇌는 다시 조급함을 보냅니다.



조급함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문제는 조급함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조급함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조급함이 문제라고 생각할 때부터 일상이 하나둘 꼬이기 시작합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비정상적'이라고 느낍니다. 또한 정신적으로 급격한 피로감을 느낍니다. 피로감을 채우기 위해 에너지를 쓰느라 에너지가 부족해집니다. 몸은 에너지 부족을 채우기 위해 폭식을 감행합니다. 점점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몸매'와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예민해지기 시작해서 짜증이 많아지고 인간관계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인간관계'와 멀어집니다. 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 애쓰고 있는데, 인생은 자꾸만 목표와 멀어지는 것처럼만 느껴집니다. 내가 올바른 목표를 좇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듭니다. 조급함이 조급함을 부르고 화가 많아집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을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방법은 하나, 조급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조급하다고 느껴질 때면, '내가 지금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구나. 원래의 내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구나' 생각하며 잠시 쉬어가면 됩니다. 예컨대, 앞만 보고 달리는 모드에서 벗어나 잠시 명상을 하거나, 1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쉬는 데에 집중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 어떤 일이든 좋으니 조급함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럼 놀랍게도 조급함은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조급함 자체는 생각보다 힘이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조급함이 힘이 강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 생각하면서 조급함을 붙잡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시간 커피를 마시고도 조급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시간에도 조급함을 단단히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조급함이라는 돌이 강물에 '톡'하고 떨어져서 작게 요동친 강물을 우리가 잠재운답시고 강물에 뛰어들어 첨벙첨벙 헤엄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강물은 더 심하게 탁해지고 요동칠 겁니다.



조급함은 우리를 찾아온 손님입니다. 손님에게 차 한잔을 대접하고 그저 바라보며 마주 앉아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저는 20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입니다. 충분히 조급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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