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쫓기듯이 일했다. 평소라면 적당히 나눠서 잘랐을 종이 뭉치를 욕심을 부려 한 번에 자르려고 힘을 줬다. 결국 미끄러진 칼이 자를 타고 올라가 손가락을 그어버렸다. 뜨거워진 손가락에서 샘솟은 굵은 피가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가벼운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피의 양을 보고 알았다.
손가락이 잘렸어요! 외치며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엉켜있던 사람들이 딱 절반으로 갈라지던 게 기억난다. '잘렸다'가 아니라 '베였다'라고 말해야 했다는 건 한참이 지나고 깨달았지만. 근데 자르긴 잘랐다. 힘줄을 잘랐는데, 다행히 세로로 잘라서 끊어지진 않았다. 급한 대로 내가 찾은 병원은 항문외과였다. 다른 선택지가 주변에 없었다. 항문을 꿰맷을지도 모르는 바늘이(물론 소독은 했겠지만) 내 손가락을 11번이나 들락거렸다. 의사 선생님도 항문만 상대하다가 손가락을 만나서 생경한 기분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10년이 흘러 쭈굴쭈굴 잔주름이 늘어난 손에 상처는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특정한 때가 없이 손가락이 찌르르르~ 욱신거릴 때가 있다. 상처 입힌 것을 잊은 내게 항의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손톱 모양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촉감이 달라진 손톱을 어루만지면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새로운 출판사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긴장하고 있는 나. 겉으론 잘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어리바리했던 나. 사람들과 대화를 즐기지 못했던 내 표정. 창문 없는 답답한 사무실. 시끄럽고,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흑백 프린터기. 그런 것들이 막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