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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집고양이 Jun 17. 2021

마카롱 지옥의 정석.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 간다랏치의 손에 잘 만들어진 할바는 식어도 공기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일품이다. 즉 땅콩류가 들어간 섬세한 수플레와 섞인,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설탕의 결정이 입안에서 사각사각 하다가 어느새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업 생산된 할바는, 거품 내는 과정을 적당히 하므로 설탕이 사탕처럼 땅콩류에 들러붙어 타게 된다. (중략)
할바란 우선 일정한 밀도와 끈기와 온도가 될 때까지 재료에 거품을 낸 결과요, 둘째로 이렇게 해서 생긴 여러 가지 거품을 섞은 다음 저어가며 식히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할바는, 과자의 품질도 맛도 끈기도 재료에 의해서도 아닌, 어디까지나 조리하는 기술에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92P '진짜 할바를 찾아서' 중에서


잘 구워진 마카롱 꼬끄를 줄 세워놓는 즐거움


취미 베이커들에게 이따금씩 열리는 지옥문 중 유명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마카롱 지옥'일 것이다. 마카롱처럼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한국인 입맛에 딱 맞추기가 힘든 디저트도 없을텐데, 초보 베이커들은 욕심을 내면서도 자주 지옥에 빠진다. 그만큼 마카롱은 쉽지 않은, 까다로운 디저트다. 들어가는 재료의 종류는 많지도 않다. 달걀 흰자와 설탕, 아몬드파우더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아이템을 제대로, 안정적으로, 동시에 일관성 있게 만들어내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 베이커들은 마카롱 지옥구간에 진입한다. 포기하거나 계속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로투스 크림의 마카롱

마카롱의 정석


우리가 아는 마카롱은 프랑스에서 라 뒤레가 만들어낸 마카롱의 형태에 라 뒤레의 손자가 만들어낸 필링 채우기 기법이 가미되어 발전한, 비교적 최근의 산물이다. 이 라 뒤레의 아이콘이 점점 더 정교한 테크닉이 된 것은 역시나 우리가 잘 아는 피에르 에르메에게서이다. 이 베이커리와 파티시에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이제 거의 없겠지만, 마카롱의 대명사가 된 이 이름들은 마카롱이라는 디저트의 한 축 중 일부일 뿐이다. 이미 이들이 전성기를 누리기 수세기 전부터도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머랭 + 견과류 과자가 있어왔기에 그것 하나만으로 마카롱을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카롱에 설령 수천가지의 종류가 있다 한들... 우리가 아는 마카롱은 한 가지. 그것은 정확히 사이즈가 딱 맞는 원형의 매끈한 과자에 일명 '삐에'라고 불리는 발이 프릴처럼 달려 있는 색색의 바로 그 모양이다. 그 사이에 버터크림이나 초콜렛 크림 등의 필링이 채워져서 숙성된 바로 그것. 고정불변의 시각적인 각인이 되어버린 마카롱은 그렇게 친숙한 것이 되었다. 한 개에 몇 천원을 호가하더라도 그 인기를 꾸준히 누려온 고급 과자의 대명사.


그러니까 전설과 같은 피에르 에르메나 라뒤레의 마카롱이 내가 정복해야 하는 마카롱의 정석이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도 험해서 나는 다양한 지옥을 경험했다. 반죽을 짜는데 줄줄 흘러 모든 반죽이 하나로 합쳐지는 머랭 덩어리 괴물의 지옥, 잘 짜서 기대에 부풀어 오븐에 넣었는데 마카롱의 상징일 법한 '삐에'가 전혀 생기지 않고 주저앉은 앉은뱅이 머랭과자 지옥, 여드름 난 마카롱 꼬끄 지옥, 정체를 알수 없이 그저 그을린 머랭과자 지옥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위가 처참히 터져버린 마카롱 꼬끄의 지옥을 만났다. 때로는 아예 때려치우기 일보직전의 나를 위로하고 계속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함인지 반은 깨지고 반은 터지지 않은 꼬끄도 나왔다. 어떤 날은 삐에가 생기면서 멋지게 부풀어올라 오븐에서 꺼내려니 바로 주저앉아버리는 꼬끄도 만났다. 아주 최근에는 멋진 모양새로 나와주었지만 막상 잘라보면 속이 텅 비어버린, 소위 말하는 '뻥카' 지옥을 허우적댔다.


물론 그 중에 입에 넣고 씹어먹어 맛없는 실패작은 하나도 없었다. 설탕과 달걀흰자와 아몬드 파우더인데 맛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참담한 좌절에 괴로워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먹어치워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당분을 섭취하며 살을 토실토실 찌우는동안, 나는 마카롱 수십 박스의 값을 지불하며 마카롱 클래스를 듣고, 또 도전했다. 때로는 도저히 이 실패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유튜브를 뒤졌다.



마카롱이 망하는 날, 망하지 않는 날


그러나 내가 찾아본 알고리즘에 뜨는 수많은 능력있는 유튜버들의 동영상들이 내게 준 위안이란, 나만 망하는게 아니구나... 라는 사실이었다. 마카롱에 숱하게 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확한 테크닉을 정량화해서 알려주기 위해 타이머로 각 단계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재서 보여주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랜선상의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런 동영상을 클릭할때면 여지없이 보이는 댓글들에 나와 같은 참패자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자기의 실패가 무엇인지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라뒤레에 도전하고 있는 이 말도 안되는 경쟁에 매우 진지했다. 그럴때면 위로가 되었다. 나만 라 뒤레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게 아니구나 싶어서.


그러다가 마카롱만 판매하는 작은 가게를 낸 분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한 가게에 허둥지둥이시던 그 초보 사장님은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야 좀 마카롱에 익숙해졌어요."


그래, 마카롱은 익숙해지는거다.





반은 되고 반은 안되던 라즈베리 마카롱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


마카롱은 재료의 성질을 잘 활용하는 기술에 성패가 달린 과자다.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프렌치, 이탈리안, 스위스 머랭의 어느 기법을 택하든 머랭을 올리는 시간과 기술을 제대로 연마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머랭마다 질감이 다 달라진다. 그러나 이 마카롱이 그저 과자가 아니라 기술인 이유는 실컷 올린 머랭의 거품을 적당히 다시 꺼트려 재료들이 어우러지게 만드는 마카로나쥬 기술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기술이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테크닉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마카롱이 꽉 차게 잘 나오는 상태가 되도록 그 순간을 지나치지도 않고 미처 모자라지도 않게 딱 맞게 완성하는 것.  마카롱이라는 어원에는 '잘 된 반죽'이라는 어원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때 그 포인트를 이해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 후에는 정확하게 원하는 크기로, 머랭이 다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짜는 스피드와 기술이 필요하다. 아... 물론 여기도 끝이 아니다. 얼마나 적당한 습도와 온도에서 잘 말리느냐, 그리고 잘 말린 반죽이 얼마나 정확한 온도에서 정확한 시간 안에 구워져서 나오느냐의 문제도 있다. 속에 들어가는 필링 따위, 그 다음의 일이다.


그래서 마카롱은 까다롭다. 까다롭기도 하고, 때로는 원인을 알수 없는 상황에서 실패한다. 내가 가진 오븐이 마카롱을 구멍내거나 속이 텅빈 강정처럼 구워내지 않고 제대로 꽉꽉 채워 구워낼 수 있는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몇 판을 말아먹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을 뒤지면 가지고 있는 오븐 기종에서 이미 말아먹어본 사람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정확한 온도가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물론 베이킹은 장비빨이라서 마카롱이 특별히 더 잘 나오는 종류의 벤츠급 오븐도 존재하긴 한다. 어느 정도 베이킹을 해 본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나 업장에서는 딱 맞는 오븐 정도는 가지고 시작한다. 그것조차도 필요없을 정도면 그가 바로 피에르 에르메이거나 그 후배일테고.



사랑스럽고 지옥스러운 마카롱 작업의 현장

이 많은 - 마카롱이 되다만 - 머랭 과자들을 먹어치우고 나서, 어느날부터인가 마카롱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속이 비어있지도 않고, 구울때마다 나름의 자기주장을 펼치는 머랭귀신들도 사라졌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오븐에서 나온 꼬끄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릴 정도로 말아먹는 일은 없어졌다. 점점 안정적이 되고,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마카롱을 굽는 일이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즐거워지고 기대치가 높아졌다. 아... 이대로 가면 나도 꼭 피에르 에르메 발 뒤꿈치는 가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평생 얼마나 많은 마카롱을 만들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사실 마카롱 꼬끄까지 성공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크림을 채우는 일은 정말 귀찮다. 그 귀차니즘을 극복해야 우리가 마카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오지만, 크림을 정복하는 것도 일은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마카롱 지옥을 살아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단계의 싸움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마카롱은 '기술'의 과자다.







레드벨벳 마카롱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지


일본의 러시아어 통역가이자 작가였던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전 세계를 누비는 동안 먹었던 다양한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미식 견문록>에 담았다. 그녀가 어릴 적 먹어본 터키식 디저트와 '할바'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위에 인용한 구절이 나온다. 아랍 세계가 유럽에 세력을 뻗쳤을 때 견과류를 전해주었고 그래서 아몬드파우더를 사용한 이런 고급과자가 탄생했다는 설에 의지한다면, 그녀가 말하는 할바와 마카롱의 재료가 어느 정도 비슷하고, 만드는 과정의 일부가 닮아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할바와 비슷한 누가나, 터키쉬 딜라이트 같은 과자들은 마카롱과는 전혀 식감이 다르지만, 그런 모든 조리법과 재료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개별화되고 발전한다. 그녀가 찾은 문헌의 마지막 구절에서 할바와 같은 정교한 디저트 역시 '기술'의 디저트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건 참 마카롱이랑 닮았다.


이제는 글로 남은 조리법들과, 사진으로 전해주는 테크닉과, 유튜브 동영상으로까지 세세한 부분을 짚어주는 기술의 정석같은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마카롱을 너무 무서워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다양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나는, 좋아하는 일을 '잘' 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는 분명히 깨달았다. 세상에는 분명히 끝장을 볼 때까지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마카롱을 만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사먹으면서 이따금씩 이런 리뷰를 쓴다. "마카롱이 너무 달아서 못먹겠는데 설탕 좀 줄여야 되는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청국장을 끓이는데 그 특유의 냄새가 안나게 해달라는 프랑스인의 불평같다. 청국장은 원래 냄새가 나야 정상이고 마카롱은 달아야 정상이다. 마카롱 필링에서 최대한 당분을 제거해볼 수는 있겠지만, 마카롱 꼬끄 자체는 설탕의 역할 없이는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해본 사람들만의 영역이 생겨난다. 청국장도 끓여보고 이 집 저 집의 청국장을 다양하게 많이 먹어본 사람만이 그 원래 모습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취미는 궁극의 것이 되어간다. 어쩌면 이 베이킹이라는 궁극의 취미생활이 내게 준 것은 엄청난 장비병만은 아니다. 어떤 기술을 제대로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해봐야만 안다는 것. 해보지 않고 하는 말들은 그저 공기중에 떠다니는 무의미한 밀가루 먼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오븐과 내 주방에서 싸워봐야만 찾아내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요즘 만들었던 말차 팥 마카롱, 밤 마카롱. 요즘엔 좀 우리에게 친숙한 재료로 필링 채우는 것이 유행인 것 같다.


어쩌면 삶의 기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이없는 비유라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 엄마가 어릴 적의 나에게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니가 키워봐"라고 했던 것처럼, 살아내야만 아는 삶의 기술이 있다. (나는 정말 나같은 딸들을 낳아서 아주 힘들게 살고 있다.) 마카롱의 지옥에서 버텨내고 나면 어느 시점엔가 마카로나쥬를 멈춰야 할 때를 감으로 깨닫는 것처럼. 물론 모든 기술들은 연마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마카롱 만드는 일을 몇 년간 쉬어버린다면 나는 또다시 마카롱 지옥에서 쳇바퀴를 따라 미친듯이 뛰고 있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작은 인간을 키워봐야 어릴 적 엄마한테 내가 왜 등짝을 맞았는지 이해하게 되듯, 청국장은 끓여보거나 날마다 먹어보지 않으면 그게 썩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마카롱을 자주 먹고 자라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마카롱이 맛있는 것인지도 사실 잘 모른다. 더 나아가서 만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마카롱 하나에 담긴 가격이 단순한 재료값의 총합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모른다. 그게 인간이 하는 경험치의 한계와 시야가 아닐까. 그러니 삶의 기술이 더 나아지려면, 어떻게든 살아봐야 한다. 살아내고, 버티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바나나 마카롱, 가나슈 마카롱, 말차크림 마카롱


마카롱 지옥의 정석을 만드는 중입니다.


피에르 에르메는 마카롱의 정석을 만들었고, 나는 마카롱 지옥의 정석을 만드는 중이다. 내가 만든 마카롱 지옥 속에서 내 동거인들은 머랭과 아몬드 분말이 만드는 맛의 형태를 다양하게 맛보았을 것이고, 우리가 팬데믹을 끝내고 난 뒤에 단체로 프랑스에 가게 된다면, 그 때는 정석을 먹어볼 것이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지금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마카롱의 정석보다 이제는 K 마카롱이 된 우리 스타일의 뚱카롱이 더 맛있게 느껴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더 달게 만드는 프랑스식의 마카롱보다 부엌에서 말아먹은 마카롱 꼬끄가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일종의 '취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카롱의 정석이 무엇이든간에 충분히 실패해보고 난 후의 나는, 적어도 마카롱 맛 만큼은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 이쯤이면 되었다. 충분히 살아보고 난 다음이면, 삶의 그 맛도 알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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