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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집고양이 Jun 12. 2021

오늘은 어떤 빵을 드셨나요?

빵의 천국에서 나만의 빵을 찾는 일에 관하여.

식량은 상품인가 아니면 도덕적 잣대의 대상인가?...(중략) 이러한 18세기의 다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18세기의 또 다른 혁신은 고급 쇼핑객의 탄생이었다. 이것 역시 익숙하다. 자유 시장은 가격 상승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것은 제분업자와 상인들 중에서도 부자를 만들어 냈다. 많은 제빵사가 부유층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더 비싸고 새로운 빵을 개발했다. 과거에는 법으로 통제받는 몇 종류의 빵만 구웠지만 이제는 최고의 재료와 기술을 사용하여 부자들을 위한 빵을 만드는 일에 헌신했다. 빵 가격도 따라서 올라갔다. 서민들의 빵은 반대로 형편없어졌다. 고약한 첨가물이 들어가기도 했다.

- <음식의 제국>, 에번 D. G. 프레이저, 앤드루 리마스. 제7장 '피' 중에서.


언젠가 만들었던 버터롤.


빵이라는 사랑에 관한 추억



빵을 주기적으로 만든다. 아니 만들어야 한다. 디저트는 아무리 만들어봐야 군것질일 뿐이기도 하지만, 막걸리를 이용해 발효종을 만들어 쓰는 법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그 발효종을 '쓰기 위해서' 만든다. 발효종의 생명줄을 연장해주려면 주기적으로 덜어내고 그만큼의 밥을 줘야 하는데, 그때 덜어낸 발효종으로 빵을 만든다. 사워도우 스타터와 비슷한 개념으로 만들어 쓰고 있는데, 아직도 나는 이게 맞는 방법인지 잘 모른다. 그냥 빵이 되면 괜찮은 것이고, 아니면 그날 아침은 좀 퍽퍽한 빵을 먹을 뿐이다. 나의 발효종에 완벽한 자신이 없는 탓에 이스트를 조금이라도 섞어서 쓴다. 사실 내게 궁극의 지향점은 완벽한 케이크만큼이나 중요한 완벽한 하드 계열의 빵이다. 내가 넘어설 수 없기도 하거나와 귀찮아서 못하는 것이 크로와상이라면 하드 계열의 빵은 내가 부엌에서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주제다.


목가적인 프랑스풍 시골 빵 캄파뉴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빵과 맛없었던 빵이 있다면 초등학교 6학년 때 버지니아에 있던 이모네 집에 놀러 가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였다. 내 인생 최초의 해외여행에서, 우리 집의 여자들이 거의 다 모인 순간에는 반드시 빵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빵을 산더미 같이 끌어안고 커피를 마시며 놀아야 '제대로 놀았다'라고 말하는 밀가루 중독자들인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빵이라는 게 그다지 흔한 시절이 아니었으니 그 갈망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모는 그때 내 인생에서 최고의 빵을 맛보게 해 주었다. 겉은 크리스피 하지만 속은 우리가 상상하는 빵맛의 모든 것인 쫄깃, 촉촉, 담백, 고소한 그런 빵. 언제 먹은 것인지 잊을 만도 하지만 그 충격적인 빵의 경지는 지금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추억거리다. 이 집안에서는 그 빵을 먹어본 자와 못 먹어본 자로 등급이 나뉜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추억을 곱씹는 대화에 끼려면 그 빵을 맛본 경험은 필수.


아마도 바게트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빵의 존재는 며칠 가지 않아서 빵에 대한 환상을 조각내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모네 집에서 머물던 나와 할머니, 엄마, 동생은 며칠간 뉴욕 단체여행팀에 합류해 뉴욕을 돌아다녔다. 그 여행만큼 형편없는 단체관광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허접한 식사를 하고 허름하고 비좁은 밴을 타고 돌아다녔고 하루 종일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이해도 못한 채 길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그 이후로 뉴욕에는 사실 트라우마가 생겼다.) 워낙에도 빵만 먹고사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을 세대의 외할머니는 결국 아침부터 맥도날드를 먹고 체해버렸다. 뉴욕의 독거노인이 허름한 차림으로 맥도날드 버거를 아침부터 씹고 있는 것을 보고는 '불쌍하게 늙는다. 따뜻한 국 한 대접도 못 얻어먹고.'라고 하셨으니까. 그 길로 체해서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간 할머니는 하루 종일 불편한 밴에 실려 끌려다니다가 할렘가 같은 곳의 뒷골목 호텔에서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그때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은 할머니는 먹다 남은 다 식은 바게트 한 덩어리를 밤중에야 간신히 먹을 수 있었는데, 그 딱딱한 빵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는 가방에 들어있던 기내식고추장을 찾아내셨다. 지구 상에 고추로 만든 발효 페이스트를 빵에 바르는 잼으로 이용한 몇 안 되는 모험가 중 한 분이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뱉듯이 말씀하셨다. "살겠네."



빵을 만드는 밤



지금도 생각해보지만, 그 두 가지 빵의 차이는 먹는 환경과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아주 편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좋은 빵을 먹는 것과 창문 바깥에서 누군가가 죽일 듯이 욕을 하고 싸우다가 총으로 한 방 갈겨버리지 않으면 다행인 상태에서 뜯고 있는 생존을 위한 고추장 바른 바게트는 전혀 다른 질적 등급을 가진다. 할머니를 살린건 바게트가 아니라 그 위의 고추장이었을 것이다.  음식은 문화다. 환경에 좌우되고, 분위기에 좌우된다. 분위기 좋은 베이커리 카페는 빵과 함께 좋은 휴식과 경험을 동시에 제공한다. 우리가 내는 빵값의 절반은 자릿세에 가깝다. 이미 인테리어 당시부터 투입된 초기비용도 빵과 함께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추억을 되살리며 만들었던 리에주 와플, 로티보이 커피번


우리가 걸어온 빵의 길.


고추장 바른 빵의 시대가 지나고 어른이 된 이후에는 대한민국에 빵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IMF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베이비부머 부모님들을 두었던 우리 세대는 가장 풍요로운 문화 산업의 중흥기에 십 대를 지났고,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즐기는 법을 아는 우리 세대에게는 빵 투어라는 신드롬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제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즐겁게 신개념 앙버터 바게트를 사 먹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빵값은 천차만별이었다. 마트 진열대의 빵과 나름의 개성을 갖춘 베이커리의 빵들은  다른 취급을 받았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로티보이의 커피번이나 어이없이 몰락해버린 대만 카스테라의 흥망성쇠, 줄 서서 사 먹다가 홀연히 사라진 벨기에식 리에주 와플까지 다양한 것들에 심취하고 경험하며 살았다. 먹다 질린 사람들은 천연발효빵으로 고개를 돌렸고, 세계적인 페이스트리 체인들은 비싸서 손 떨리는 크로아상을 팔며 성지순례를 유도했고, 일본식 제과제빵의 유행도 펼쳐졌다. 나의 세상이나 당신들의 세상이나 빵으로 가득 찼다. 그 시간 동안 밥은 쌀밥 아니면 잡곡밥일 뿐이지만.


요즘의 인별그램에서 놀고 있는 전 세계의 베이커중에는 각자 좋아하는 아이템만 집중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베이커는 끊임없이 마블 형태의 식빵만 만든다. 또 어떤 베이커는 계속 사워도우 브레드를 만든다. (사워도우는 팬데믹 이후 미쳐가는 베이커들을 구제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또 어떤 베이커는 날마다 크로아상 같은 페이스트리류를 만든다. 그들은 프로 베이커들이 아니지만, 각자 특화된 부분을 계속 파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유행에 민감한 우리를 제외하고 세상의 베이커들은 마치 우리가 쌀밥만 먹는 사람, 잡곡밥만 먹는 사람, 진밥만 먹는 사람이 있듯이 계속 같은 빵의 다른 버전을 올린다. 이건 궁극의 취향이다.


그에 비해 나는.... 이것저것 건드리고 이것도 저것도 다 잘되진 않는다. 이미 겪은 빵이 너무 많다 보니 이것도 추억이고 저것도 추억인 데다가 이것은 새로운 유행이고, 저것은 종국에 내가 정복해야 할 산이다. 그러니 산만한 나의 작업방식은 끝도 없이 펼쳐진 밀가루의 산처럼 보인다. 파도 파도 쏟아져 내릴 것이다.





당신의 궁극의 빵은 무엇인가요.



집에서 만들어본 완전 코리안 마늘 바게트

하지만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궁극에는, 내가 겉바속촉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하드 계열 빵을 날마다 다른 버전으로 만들어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이 지루한 정복왕의 노선을 따라가다 보면, 빵에 관한 유일무이한 추억에 다다른다. 그것은 가장 기분 좋고 걱정 없던 시절에 먹었던 따뜻한 형태의 추억이다. 아무리 핫한 카페들을 투어하고 돌아다녀도, 빵만 먹고 돌아서면 라면을 먹어줘야 하는 아시아 한반도의 인간종에게는 빵이란 사실 번외의 취미에 가깝다. 아침을 식빵으로 대체하는 우리의 삶은 사실 경제 사회적인 상황에 따른 문화변동의 산물일 뿐이다.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물가는 당연히 양지와 음지를 만든다. 거대한 베이커리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먹거리는 일종의 그늘도 만든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음식의 제국> 속 한 구절을 생각해냈다. 마가린을 먹느니 창문을 깨부수는 게 낫다고 여기는 소비자는 18세기 이후부터 내내 있어왔던 현상인 것 같지만, 마가린만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문제로 남는다. 고메 버터를 사용한 온갖 디저트들이나 천연발효빵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수많은 빵들이 라인업을 채운 베이커리의 쇼케이스는 추억이기보다는 럭셔리다. 어쩌다 하는 경험이고 그래서 아주 이따금씩 밥을 대체한다. 우리는 마가린 때문에 창문을 깨부수진 않겠지만 건강에 좋은 잡곡밥이나 고시히카리 품종의 쌀밥을 포기하고 몇 년 묵은 정부미를 먹으라 그러면 창문을 부술지도 모른다. 우리는 틈만 나면 고점을 뚫는 버터 값을 감당하면서까지 빵에 매달리는 전통 속에 살고 있진 않다. 어디까지나 남의 전통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을 뿐.


딱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오늘도 바게트나 캄파뉴를 제대로 굽기 위해 애쓰고, 치아바타와 사워도우 등의 빵을 위해 베이킹을 한다. 여기에는 딱히 마가린과 버터의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물과 밀가루와 소금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미리 밀가루와 물로 만들어 놓은 발효종 정도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그 단순한 것들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내게는 빵이라는 것이 추억의 원형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되겠다.


진짜 고구마 같지만 고구마빵일 뿐인 그것.

사람들은 힘들 때 편안한 것으로 돌아간다. 요즘 핫한 것들은 정말 우리가 한국인임을 증명하는 강릉 육쪽 마늘빵이나 진짜 고구마나 감자같이 생긴 빵이다. 아니면 추억의 크림빵을 재해석한 빵이거나. 심지어 빵과 인절미가 뒤섞이고 말차 대신 쑥을 쓴다. (일본 교토 근처의 우지산 말차가루 가격을 보면 쑥을 쓰는 게 여러모로 현명해 보이기는 한다.) 푸근한 것들로 돌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결국 가장 투명한 내면의 진심이듯이, 나는 그 시절의 추억으로 가득 찬 바로 그 빵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만약 내 프로젝트가 제대로 풀린다면, 땡 빚을 내서라도 벤츠급 오븐을 사서 대량 생산한 뒤 날마다 우리 집 여자들과 함께 나눠먹을 것이다. 물론 그 추억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그때의 그 기분을 나누어주면서.




굶주림이 꼭 공정하지 않은 것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배고픔을 자신의 이윤으로 바꾸는 행위는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분노한 맨해튼 주부들은 굶어 죽을 만큼 굶주리지 않았다. 수세기 전의 영국 식량 폭동 때와는 달랐다. 그들의 자녀도 감자가 없어서 정말로 아사할 지경은 아니었다. 한 시위자는 자신이 마가린을 싫어했고, 그리고 버터에 익숙해졌기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노라고 말했다. 그것이 분노한 이유다. 마가린을 먹느니 창문을 깨부수는 게 나았다. - 같은 책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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