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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잘레스 파파 Mar 28. 2022

[14] 백미 예찬

民以食为天(민이식위천)

民以食为天(민이식위천)

백성의 먹을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춘추전국시대 "사기"에 나온 경구다.

백성들을 굶기지 않고 어떻게 배부르게 먹일까?

"이밥에 고깃국"이 근대 정치의 모토가 될 만큼

우리 밥상 한 구석에는 민심, 천심, 정치가 녹아있다.


제목을 그럴듯하게 "백미예찬"이라 지었는데,

본문의 내용은 "백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써볼까 한다.


개항 전, 오랜 기간 조선 백성들이 먹었던 쌀은

탈곡이 덜 된 일종의 "적미(피가 섞인)"가 다수였다.

조선의 도정 기술 수준이 떨어졌고,

워낙 품종이 다양해 개량이 쉽지 않은 종자였던 탓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내세웠던 정책 중 하나가

"식량증산계획"이다.


대륙으로 나가는 군수기지로 조선을 이용하기 위해

일단 전장에서 쓸 먹기 좋은 쌀을 늘리자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렇다보니 자신들의 종자인 "자포니카"를 가져왔고,

지주들은 판매 시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일본산 백미를 선호했다.


쌀의 구조, @농민신문 (출처)


기존에 탈곡이 덜 된 현미보다

탈곡이 잘 된 백미가 먹기에도 좋고 수익성도 좋아

기존의 토종 볍씨 품종은 자취를 감췄고,

일본산 자포니카 품종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가장 먼저 개점한 곳이

"쌀가게"일 정도로

일본은 조선에서 난 쌀들을

오사카로 실어 나르는데 분주했다.


게다가 곡창지대의 쌀을 일본에 수입하기 좋게

철로를 깔아야 되는데

제물포에서 여주, 군산에서 송정에 이르는

이른바 혁개열차(쌀을 실어 나르는 프랑스식 열차)는

일본 자본이 아닌, 지주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해안 일대에 만석꾼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정래 작가님의 <태백산맥>에 보면

미군정이 들어오고 농지개혁에 대한 물결이 한창 일어날 때

벌교 밭은 미곡을 둘러싼 이념 전쟁이 한창이었다.

만석꾼들은 쌀을 용산 기지에 실어 나르느라 바쁘고,

쌀은 당장 창고에 저장되다 보니 막상 백성들이 먹어야 될

쌀은 부족해지는 상황이 되고

쌀값은 백배 천배 오르는 일도 부지기수.

이때 생겨난 쌀 자본은 그들을 지역 유지로, 국회의원으로,

나아가 자본가로 만들어줬다.




백미예찬


쌀은 깎인 정도에 따라 현미, 5분도미, 7분도미,

그리고 백미(10분도)로 분류된다.

벼는 겉껍질인 왕겨와 알맹이인 현미로 이뤄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쌀은 왕겨를 제거한 남은 알맹이로,

왕겨와 현미를 제거하면 백미가 된다.


일제강점기에 발달된 도정기술이 도입되면서

장기보관이 쉽고 식감이 좋은 백미가 선호되고,

영양가는 현미가 높지만, 일단 밥의 질감을 높이고자

백미로 도정을 했다.


하지만 이런 도정기술이 발달한다고 한들,

생산에 좋은 볍씨로 품종을 개량한다고 한들,

수많은 조선의 소작농들은 오히려 일품을 팔 뿐

맛 좋은 백미 한 그릇 대접받지 못하고

초목의 뿌리나 잎새로 연명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밀" 소비가 장려되고, 분식장려운동이 펼쳐진 얘기들은

앞서 서술했으니 생략한다.


한반도의 재래 벼 품종은

식민지 기간을 거치며 거의 다 사라졌다.

하지만 워낙 장기간 기근이 계속되자

쌀은 턱없이 부족했고,

밀 소비로 주식을 대체하는 것도

국민적 반발이 심했다.


이 시국에 서울대 농대 교수인 허문회 박사는

벼 품종을 개량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자포니카 품종과 인디카 품종을 교배해

잡종 씨앗인 "IR667"을 개발한다.


이 품종의 생산성이 보장되면서

정부는 이 품종을 "통일벼"라 명명한다.

쌀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뜻이다.

1976년 역사상 최대 풍작의 수확을 거두었지만,

워낙 백미를 좋아하는 한국인 입맛에는 맞지 않아

"정부미"는 국민들에게 큰 사랑은 받지 못했다.


결국, 1965년경 도입된 일본 아키바레 볍씨가

한국인의 입맛에 탁월했고,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쌀은

아키바레와 고시히카리라는 품종이 됐다.





지금은 맛있는 흰쌀밥 한 그릇을 두둑하게 먹어야

제대로 소화된다는 한식 타령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속에 신토불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먹고 살만큼 경제가 성장했지만,

여전히 식량자급률은 20%대로 굉장히 낮은 수준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식탁 물가를 좌우할 만큼

애그플레이션이 심각하다.


식량 위기는 곧, 식량 안보로 이어진다.

당장의 석유값은 기름을 넣을 때마다

가격이 눈에 선하게 들어와 체감이 되지만,

생각보다 쌀값 인상에 대한 체감은 낮은 편이다.


일본이 아무리 자기네 좋은 볍씨를 갖다가

한국인 식성을 맞춘 들 결국 공급의 차질은

조선시대보다 더욱 수많은 백성들을 굶주리게 했고,

우리 기술력으로 개발하고, 우리 땅에서 난 품종들은

이미 외래종들에 밀려 품종에 대한 수수료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 한국인의 입맛을 바꾼 건

일제부터 이어진 권력의 농수산 정책이 기여한 바가 크다.

양식과 품종 개량으로 이어지는 기술력은

다행히 한국인의 식생활 개선에 기여했지만

무뎌진 식량 안보의식은 되려 뒤통수를 맞을 일이다.


백미예찬으로 시작된 "쌀밥전쟁"


그 역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은,

이미 늦어버린 시점이 아닐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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