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린 선물 in 마라도
2021년 5월 10일 (월) / 28일 차
2021년 5월 10일, 월요일 (28일 차) 신이 내린 선물
강정 숙소 → 송악산 포구 → 마라도
→ 마라도에서 (톳짜장, 해물짬뽕 ★★★★)
→ 마라도 일주 → 켄싱턴 리조트 → 강정 숙소
새벽 6시가 안 돼 눈이 떠졌다.
여름이 가까워오니 해가 길어졌다.
새벽부터 누워서 오늘은 어디에 갈까 검색한다.
앱을 뒤적이다 보니 마라도 배편이 눈에 들어온다.
모바일 예매는 6% 정도 할인이 된다.
24개월 미만 아이는 무료운임이다.
세 가족 기준으로 42,000원이면
마라도에 다녀올 수 있겠다.
갈 곳이 정해지면 오늘의 날씨를 검색한다.
이번 주 내내 비 오거나 흐린 날씨다.
그나마 오늘과 금요일이 반짝 해가 뜬다.
여기에 있을 날도 일주일 정도밖에 안 남아서
가고 싶은 곳들은 우선순위로 가보기로 한다.
그래서 오늘, 마라도 배표를 예매했다.
날씨 상황을 봐서 유동적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가는 길 내내 약한 비가 뿌렸고, 시야도 흐려서
일단 모슬포항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항구에 도착하니 여기도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제주는 어딜 가나 날씨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많구나...
예매 티켓을 바꾸기 위해
빠듯한 시간에 맞춰 섰는데 웬걸?
마라도 가는 배편이 모슬포발이 아니다.
송악산발이었다.
일찍 출발해야 여유 있게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일찍 나왔는데
결국 10시 반 배를 놓치고
서둘러 송악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모슬포 운진항에서
10분 거리에 송악산 항구가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표를 바꾸니
겨우 11시 배를 탈 수 있었다.
가까운 산방산도 구름이 가득해 뿌옇게 보이고,
시야가 워낙 나빠 마라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풍경은 이미 포기했다.
비만 내리지 말길...
송악산항은 운진항보다 덜 붐볐다.
배 좌석도 여유 있어 가급적
코로나 시국에는 이곳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하다.
마라도에 닿는 배편은 모슬포 운진항발, 송악산발 2곳이 있다. 약 30분 소요
송악산 포구에서 마라도까지는 약 30분 거리다.
멀리서 보이는 작은 섬이었는데
은근히 거리는 꽤 멀다.
중간에 스치듯 지나는 가파도는
높은 언덕 하나 없이
멀리서도 보리밭과 풍력발전기가
유난히 돋보였다.
마라도 첫 인상
섬에 도착할 때 맞는 첫인상은 바로 포구다.
멀리서 아른아른 보이는 섬 모습과
가까이 섬에 밀착해 보이는 인상은 사뭇 다르다.
마라도 첫 느낌은 거문 해안절벽 아래로
여러 개의 동굴들이 아슬아슬 펼쳐지고
좁은 항구에 어렵사리 뱃머리가 닿는,
실력 좋은 선장이 가까스로 배를 댈 수 있는 곳이었다.
절벽 사이로 낚시꾼들은 낚싯대를 맨다.
언제 어디서나 가장 좋은 절경은
낚시꾼들 차지다.
포구에 내리자마자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올라야
넓은 초원이 나온다.
나름 방송일 덕분에
섬을 꽤 많이 다녔다고 자부하지만
이곳은 대한민국 어떤 섬보다 첫인상이
가장 멋진 섬으로 꼽을 듯하다.
보통은 2시간 단위로
섬에 머물 여유를 주고 왕복표를 끊어준다.
하지만 아이들이랑 함께 돌아야 하는 관계로
여유 있게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4시간.
아침 일찍 나온 관계로 허기부터 달래야겠다.
언덕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짜장면 가게다.
“짜장면 시키신 분?” CF로 유명한 섬, 마라도.
대한민국 최남단이라는 사실보다
이 광고가 더 먼저 떠오를 정도로
한 통신사 광고의 역할이 컸다.
연달아 3개의 점포가 있었고
아주머니들이 가게 앞에서 손님을 모으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아이들이 앉을만한
너른 자리가 있는 곳에 들어갔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찐 맛집들은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많다는 사실.
그래도 허기에 먹은
톳짜장과 해물짬뽕은 꽤나 감칠맛 났다.
아이들은 인생 첫 짜장면을 마라도에서 먹었다.
대단히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허기가 반찬이라 맛있게 접시를 비우고,
밥 한 공기를 싹싹 비벼 배를 채웠다.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오자 하늘이 갰다.
제주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국적인 바다, 이국적인 햇살, 이국적인 아이들?
식사를 마치니 이곳에 머물 시간이 3시간 남았다.
시간 여유 있게 섬을 한 바퀴 걷기로 했다.
아이들 손에 꼬깔콘 한 봉지를 들려줬다.
양손 가득 과자를 든 두 딸은
좋은 햇살에 소풍 나온 기분으로
신나게 종종걸음을 걷는다.
예음이는 물 만난 고기가 됐다.
사방이 넘어져도 위험할 곳 없는 잔디밭이라
마음껏 뛰게 했다.
인근에 분교가 있었지만
이미 아이들이 없는 섬이라
폐교가 된 지 오래였고,
내부는 출입을 금했다.
그래도 한 때 이 섬을 배경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어른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늘 폐교가 된 학교를 보면 그런 아쉬움이 든다.
마라도는 우리가 머물렀던 우도에 비해
굉장히 작은 섬이다. 우도는 한 바퀴 도는데
차량으로 30분 남짓 걸렸다면,
여기는 도보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마을 인구는 100명이 채 안 되고,
간혹 낚시하러 온 민박객들이 좀 찾는 편이다.
웬만해서는 반나절 일정으로 들어오거나,
가파도에 걸쳐 하루 일정으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많다.
태풍이 오거나 풍랑이 세면
여기도 물살이 세 배가 뜨는 게 어렵다.
제주도 인근 섬들은
지척에 육지 같은 제주도가 보이지만
배가 끊기면 멀고 먼 섬이다.
막상 섬에 고립돼 삶을 보낸다면
꽤나 답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라도는 신기하게도 높은 언덕도 숲도 없어
조금만 고지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섬 전체가 조망 가능한 섬이었다.
이 조그만 섬에 교회도, 성당도, 절도 있었다.
마라도에는 전복을 닮은 성당이 있다.
성당이라기보다는 작은 수도원 같은 분당이다.
넓은 초원에 우뚝 서 있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내부에 들어가니 아담하고 포근하다.
여기에서 한껏 쉬면서 기도하면 참 좋겠다 싶다.
그래도 마라도에 온 기념으로
기도문에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빌었다.
성당 앞에서 한창 뛰놀고 있는데
나이 지긋하신 분이 필름 카메라로
마라도 곳곳을 찍고 계셨다.
그러더니 아이들의 뛰어노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며 사진 몇 장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셨고,
덩달아 가족사진도 몇 장 예쁘게 담아주셨다.
가끔은 나도 홀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이들 모습이 예쁘거나 가족들 모습이 맘에 들 때
배경을 찍는 듯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거나,
사진 한 장을 찍겠다고 부탁드리기도 한다.
오늘 그분 사진기에 담겼을 가족사진에
그런 자연스러움이 담겨있길 소망해본다.
가볍게 섬 한 바퀴를 돌고 나니 배 시간이 가까워졌다.
아이들과 섬 전체를 천천히 조망하는데
세 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것 같다.
물론, 좀 더 머물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아이들도 어른들도 조금은 지친 터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맑았던 날씨는 또 변덕을 부리며
다시 비를 흩뿌리기 시작한다.
제주에 돌아가는 배편은
마라도로 올 때보다 더 빠른 느낌이다.
산방산 위로 구름 나그네가 갓을 씌우고 지나간다.
나는 그 풍경이 꼭 원자폭탄 버섯구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이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산은 밥솥 같고, 구름은 가득 넘친 밥 같다”
아이의 때 묻지 않은 표현이 너무 좋았다.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이의 시선에서
표현한 것이다.
가끔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
어른의 상상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너무 신선하고 아름다운 표현들이 들릴 때가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질문들을
어른들이 푸는 예능 프로그램도
과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 순수한 낭만이 너무도 부러웠다.
마라도 여행은 내게 동심을 선사해줬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그 옛날 광고도 떠올렸고,
학생이 없어 폐교된 분교를 보며,
사라진 학교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고
아담한 전복을 닮은 성당에서 마음속의 평화를 빌어보며,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귀엽고 신선한 표현에
작은 충격을 받았으니
오늘의 이 기운은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