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뷰자데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by KJH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이 책은 자유, 사랑, 혼밥, 수집 등 여러 단어에 대해 들뢰즈의 철학과 신화 속 이야기를 가져와 해당 단어의 본질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분명 같은 한글로 적혀 있지만,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얇지만 어려운 철학책을 읽었던 경험이 있다. 물론 이 책의 모든 인용이 쉽다는 말은 아니지만,비교적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개념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나처럼 철학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읽기에 크게 어렵지 않은, 인문 철학 에세이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구성은 소설처럼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는 옴니버스 형식이라, 중간중간 끊어 읽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마치 시집처럼 모든 시가 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점이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별점 후기들을 보면 "너무 좋았다"는 의견과 "인용된 글이 너무 어렵다"는 의견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것 같아 보인다.

나의 경우 아무리 좋아하는 시집이라도 그 안의 모든 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시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 시집을 구입한 경험이 있기에 어려운 인용이 들어간 파트들에 대한 반감은 크게 없었다.


하나의 시집에 있는 수십개의 시들 중 내가 좋아하는 시를 발견하는 비율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이 책에서 좋았던 글들을 많이 발견했다. 사실 본문을 보기 전에 책의 첫 글인 프롤로그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어느 한순간,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며 커다란 은행나무를 앉아서 바라보는 눈이 동그랗고 몸집이 커다란 리트리버를 바라보는 듯한) 작가의 1인칭 시점이 아주 느린 장면으로 그려지는 경험을 했다. 마치 작가의 기억 속에 잠시 다녀온 듯한 기분이랄까. 이런 경험을 소설이 아닌 철학 에세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새로웠다.

커다란 잎사귀가 자신에게 입혀진 황금 도금의 무게를 못 이겨 아래로 떨어질 때, 잎사귀의 그 느린 동작을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리 집 가을 강아지와 함께 나무들 사이에 있는 것도 좋다. p.6-7


책을 다 읽고나서 다른 리뷰들을 보며 작가가 철학과 교수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문학비평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책의 문체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차갑고 딱딱한 철학의 색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서정적 느낌이 더 많이 느껴진다. 작가의 이런 문체가 ‘철학’에세이 임에도 불과하고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추천서라는 타이틀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을 것도 같다.)


본문에서는 '반복' '바보' '산책' ‘사랑’에 대한 에피소드들은 마치 평소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꺼내 보이지 않았던 본질적 개념을 새롭게 알게 되는 '뷰자데'적인 느낌을 주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철학적이라고 느낀 부분도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온 듯하다.

그러나 바보 이반은 오로지 그 자신이 바보이기 때문에 혼자서 악마를 이길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보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음을 알아챈다. …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바보의 ‘순수성’에서 나온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p.109-110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 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p.180
사랑의 말은 발화되지 않으면, 바람이 없을 때 죽는 바람개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잠잘 뿐이다. ‘법’의 말은 이와 다르다. 법전 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 그러나 어떤 말은 꼭 입으로 내뱉어야만 유효해진다. ‘사랑한다’와 같은 말, ‘맹세한다’와 같은 말이 여기 속한다. 사랑은 어디 있는가? 맹세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말 속에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을 비로소 현실로 만든다. 맹세한다는 말만이 비로소 맹세를 세상 속에 등장시킨다.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있는 현실속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창조해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p.200


또 다른 별점 후기 중에서 표지가 예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던 이유 중에 표지 디자인에 대한 지분이 꽤나 컸다. 책을 읽기 전, 제목만을 보고 이 책의 내용을 추측했을 때 철학자의 말로 우중충한 마음의 날씨를 맑게 바꿔주는 책이려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삶을 쓰다듬는 위안의 책이라는 부제가 표지에 적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표지에 그려진 멋진 풍경화를 보았을 때 내게 보이는 건 고민이 사라진 후의 맑은 하늘도, 걱정이란 먹구름이 가득 낀 흐린 하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자가 져 있어 그것이 먹구름인지 뭉게구름인지 알 수 없는 구름이 가득한 바다 한가운데서 마주한 노을의 풍경이었다. 우리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 시야를 가리는 구름이 가득 끼어 있다. 무슨 짓을 해도 그 구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책 제목처럼 날씨가 한순간에 바뀌는 기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낮에서 그 무엇도 잘 보이지 않는 밤으로 넘어가는 접점의 순간을 그린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눈가리고 아웅식의 위로라면 사양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반복'에 대한 이야기들이 특히 강조된다. '산책'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축제'의 경우에도 그 단어 속에는 '반복'이라는 본질이 있다. 매일 같은 코스의 산책도 그날의 날씨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나의 체력은 천천히 쌓인다. 매년 하는 축제에서의 반복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무언가가 축적되며 변화하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노을은 하루의 끝이면서도 동시에 오늘의 하루를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삶이 된다.

반복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것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과거의 것을 반추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과거의 의미를 이해한다. p.39


이 책은 철학을 통해 마음의 날씨를 '매우 흐림'에서 '매우 맑음'으로 바꿔주는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위로를 해 주는 책이라기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들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는 '인지의 책'이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많은 단어의 본질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 단어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고, 결국 우리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 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 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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