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감각
광화문 디타워가 처음 생긴 2015년, 그 건축물은 건축가계에서 꽤 큰 화제였다.(사실 당시 학생신분이라 정확하진 않다.) 다만, 분명히 기억나는 사실은 내가 디타워라는 건축물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말은 건물의 컨셉이나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광화문 디타워.. 그거 건축가가 설계한 게 아니라, 어떤 한국인 디자이너가 설계한 건물이래. “
당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지금과는 달리,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예쁘게 포장하는 역할에 국한되어 있는 느낌이 강했었다.
‘디자이너가 설계한 건물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과 얼마나 다를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디자이너가 건축까지 하게 해 줬을까?’라는 색안경을 가지고 교보문고를 가던 날, 겸사겸사 답사를 가보았는데 꽤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비록 당시에도 그리 넓지 않은 건축적 견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전까지 봤던 어떠한 오피스 건물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공간감 때문이었다.
분명 내부이지만 외부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감. 거의 없다시피 한 좁은 1층의 로비공간, 넓은 테라스 공간을 가지고 있는 식당들의 계단식 배치가 만드는 공간의 레이어, 지하철과 백화점에서 보던 익숙한 두 줄 서기의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올라가는 방향과 내려가는 방향이 각각 한 줄씩 붙어있는 좁지만 타보고 싶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디타워의 전경은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오피스의 이미지와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후 디타워의 공간을 그렇게 디자인한 이유를 2층이상 상가들의 임대료 관점에서 들어보니 그러한 공간의 디자인 접근방식이 기존의 건축가에게선 나오기 어려운 설계프로세스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학생신분이라 3층 이상의 비싼 식당에서는 밥을 먹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서 2층의 피자집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자리도 없어 입구 옆 복도에 있던 두 테이블 중 하나의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피자를 주문한 뒤 사람들의 백색소음이 들리는 디타워의 전경을 바라보며 피자가 나오길 기다렸던 기억이 있는데 자린고비처럼 디타워의 전경을 피자를 먹으며 올려다보던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후에도 광화문근처에서 약속이 있는 날이면 항상 디타워 2층 폴리스피자를 찾아가 매장 내에 자리가 있더라도 일부러 외부 테이블에서 피자를 먹곤 했다.
당시에 디타워를 설계했다는 그 디자이너의 이름은 한 귀로 듣고 흘렸으나, 이 책을 읽으면서 디타워의 그 사람이 조수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디자이너 조수용이 생각하는 일과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조수용은 디자인업에 종사하면 거의 다 알고 있는 매거진 B와 우리가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느끼는 네이버의 녹색 검색창을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책을 읽으면서 이전의 네이버의 상징이 날개 달린 모자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다른 리뷰어들이 이 책을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일하는가'라는 책과 많이 비교하는 것 같은데, 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서는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렇게 일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던 반면, 조수용은 '나는 이렇게 일해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조금 덜 강요적이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뢰를 쌓으려면 일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너보다 더 오너십을 가지는 것입니다. ... 쉽게 말해, 오너의 신뢰를 얻으려면 오너의 고민을 내가 대신해주면 됩니다. p.25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세상의 흐름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며, 사소한 일을 큰일처럼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이것이 감각의 원천입니다. p.72
관심 없거나 힘든 일도 일단 해본 뒤 스스로 물어보는 겁니다. '그럼에도 재밌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그게 뭐였을까?' p.75
책에서 반복하면서 말하는 건, 감각적이라는 말은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하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카소처럼 붓만 쥐어주면 몇 초만에 작품이 나오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에 감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디자인하기 위해서 그것을 경험했을 때의 나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에서부터 감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그것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심지어 좋아해 보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저는 내 취향을 깊게 파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높이 쌓아 올린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 '감각'이라 생각합니다. p.53
좋아하는 걸 찾아서 그 분야를 직업으로 삼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실 그런 경우가 흔한 건 아닙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그 주변을 계속 맴돌며, 좋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감각의 시작입니다. p.76
저는 이렇게 해요. 내가 카페에서 언제 좋았지? 내가 무슨 기분이었지? 아! 그때 메뉴판이 이래서 좋았구나. 그때 음악이 없어서 새소리가 들렸구나. 오로지 내가 좋아했던 순간을 끝까지 추적해서 구체화하고 단단하게 정리해요. 그게 '브랜딩'이에요. 그런 다음 이것저것 안 중요한 걸 빼요. 불필요한 걸 빼고 나면 오히려 남다른 캐릭터가 생겨요. p.178
감각적인 디자인의 끝은 나의 경험에서 시작한 아이디어에서 이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면 된다. 사실 이 작업이 가장 어려워 보인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네스트 호텔의 경우, 침대를 창을 향하게 배치하는 과감한 선택을 했는데, 생각해 보면 기존의 모든 호텔처럼 침대에 누웠을 때 티비를 바라보는 배치를 꼭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잃지 말아야 하는 그 일을 시작한 이유인 브랜드의 철학은 소중히 간직한 채 말이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건 '무엇을 선택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말아야 할지를 잘 가려 내는 것이 곧 감각입니다. p.99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습니다. ... 본질로 돌아가는 것. 그게 바로 감각의 핵심입니다. p.154
즉 가격이 비싸도, 실용성이 좀 떨어져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도 철학이 있다면 브랜드는 완성입니다. p.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