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것보다요?

갭이어 후 취직까지 -1

by KJH

1년 하고도 1개월.. 생각보다 길게 갭이어를 보냈다.


첫 입사 후 3년 2개월 동안이나 다녔던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으론 일본으로 한 달에 걸친 긴 건축답사 여행을, 여태 모아둔 돈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며 지냈으나 이제 모아둔 돈도 전부 떨어져 간다. 3개월만 놀아도 다시 취업하고 싶을 거라던 주변사람들의 말을 아직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생각보다 백수생활을 너무 잘 즐기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백수일 때가 직장인이었을 때보다 더 바빴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은 돈이 충분할 때 유효한 이야기이다. 돈이 점점 부족해지자 나의 활동반경은 이전에 비해 확연히 좁아졌다. 계속 행복한 백수생활을 즐기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필요하기에 일이 필요했다. 급하게 올라온 건축설계사무소의 공고글들을 찾아보았지만 맘에 끌리는 공고는 딱히 없었다. 애초에 취업이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첫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경로도 학과장 교수님의 추천을 통해서였기에 따지고 보면 나는 구직활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첫 구직활동인 셈이다.


지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공고가 없다면 회사의 조건을 따져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물론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당장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조건에 맞는 사람과 선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올라온 공고들을 보면 다들 형식적인 소개글들 뿐이었다. 수십 개의 회사들의 공고가 있었지만, 눈에 띄는 곳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는지, 내가 소장이라면 이렇게 딱딱하고 재미없게 쓰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다들 키가 몇이고 몸무게가 몇이니 하는 이야기들 같아 보였다. 취미는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같은 내용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자신들의 회사에 대해 소개하는 굉장히 긴 글을 보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들은 일종의 소수정예이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진 않는 회사라는 이야기와 대표는 국내 대형건축사사무소 출신이며, 월말마다 답사와 문화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곳이었다. 위치도 집에서 지하철로 3-4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워라밸이라는 단어와는 먼 회사생활을 해왔으니 궁금해서 지원하게 되었다.

며칠 뒤 지원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T건축입니다.
서류 검토결과 2차 면접을 시행하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일시 : 2024년 N월 N일 N시
장소 : 강남구


그래도 첫 면접이라고 꽤나 긴장이 되었다. 회사 건물은 어느 상가건물의 맨 위층이었다. 모두 유리로 덮여있는 건물이라 여름엔 꽤나 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이전까지는 소규모 아뜰리에에서만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회사에 실이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없었는데, 이곳은 회의실이 구분되어 있었다. 또 파티션으로 각자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사무실이 전체적으로 밝은 청록색 빛이 돌았다.


조금 싸했던 건 사무실 공간은 굉장히 컸는데 일하고 있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의 시설이나 환경은 전에 다니던 곳에 비해서는 좋아 보였는데, 왠지 모를 싸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분이 고개인사를 하며 회의실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제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직원분 이외에는 그 넓은 좌석에 다른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직원보다 임원들이 많은 곳인 것 같았다. 대표님과 본부장님과 면접을 진행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소규모 회사임에도 프로젝트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그 점에 대해 여쭤봤는데 지방에 규모가 있는 본사가 있고 서울에는 지사형식으로 디자인 중심의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복지나 임금에 대해서는 굉장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길게는 아니어도 일단 다녀볼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일어서며 임원 중 한 분이 내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저희 회사, 어떤 것 같으세요?"

"음..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것 같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요?"


아차 싶었다.

내 마음속에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이다. 면접을 마쳤다는 생각에 마지막 긴장의 끝을 놓아버린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다는 말은 좋다는 말이긴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으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조금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어서 돌아가는 길에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면접을 편하게 진행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문자를 남겼다.


며칠 뒤 구체적인 연봉을 포함한 합격문자가 왔다. 이후에 회사 후기를 여기저기서 찾아봤는데, 내가 느낀 싸함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다행히 월급을 제때 안주는 악덕기업이거나, 성희롱이나 인성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나 면접당시 느꼈던 내 예상대로 디자인에 치중된 회사이기 때문에, 실무를 제대로 배우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심지어 디자인만 하는데 디자인도 그리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지방에 위치한 본사의 연고 때문에 꾸준하게 괜찮은 수주를 하는 곳인 듯하다는 정도의 이야기였다.


읽어보면서 배우는 것은 좀 없을 수 있겠지만 돈은 벌 수 있겠구나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냐.

지금 나의 처지는 그런 것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우선 생활비를 벌면서 다시 후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했다.


출근날짜를 3일 앞두고 한통의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여긴 R건축사사무소라고 합니다. 이번 주에 면접을 보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연락을 준 회사 또한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회사에 대한 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고 공고에 적힌 홈페이지는 구인을 위해 급하게 만든 듯해 보였으나, 건물들의 디자인은 여느 아뜰리에보다 더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소규모 근린생활시설들을 위주로 진행하는 것 같아 보여서 내가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 보였고, 3D 이미지들이 아닌 실제로 지어진 건물들의 사진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많아 보여서 실시도면을 접할 기회가 많아 보였고, 실무적으로도 굉장히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보여 지원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3일 뒤에 출근을 하기로 된 몸이 아닌가.


"아.. 제가 그런데 이미 다음 주부터 다른 곳으로 출근을 하기로 해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래도 이야기는 해볼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


그렇게 전화를 받은 다음날, 나는 R건축사사무소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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