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후 취직까지 -2
우선 R건축사사무소에서 두 달 만에 뛰쳐나왔다는 말을 해야겠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청난 가스라이팅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 면접에서 느낀 R소장님의 건축에 대한 열정이 조금 감동스럽기까지 했기 때문에 T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는 것보다 연봉도 훨씬 적고, 일도 훨씬 힘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름의 각오를 하고 실무를 속성으로 배워보자는 생각에 선택한 일이었다. 전에 다녔던 회사 욕을 하는 것은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정확히 어떠한 이유에서 그곳을 두 달 만에 뛰쳐나오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야근비 없이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일하는 곳이라는 점, 어느 하루는 회사를 재정비한다고 반나절동안 대청소 및 자리 재배치, 처음으로 의자에 올라가 드릴로 천장에 나사도 박아보았다. 사실 이런 일들은 작은 사무소라면 직원들이 직접 그럴 수도 있다는 노예 마인드는 어느 정도 있는 편이라, 그런 것들은 나의 퇴사이유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그저 일보다 사람에 대한 문제였다고만 말하겠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해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도 내 나름의 퇴사 이유들이 된 것은 맞지만 말이다.
작성할 땐 조금 불안했지만, 계약서에 수습기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수습기간을 마치자마자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다시 반년동안 건축설계는 아닌 건축프로젝트를 하면서 지내왔다. 이후 다시 구직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나서 지원했던 회사들 중 처음으로 면접 연락 메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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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A 건축사사무소입니다.
먼저 저희 사무소에 지원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자료 검토 결과 1차 서류 전형 합격하시어, 면접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래 일시에 맞추어 회사로 방문 주시기 바라고, 회사 주소는 메일 하단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면접일시 : 2월 N일(수) / 16:00, 오후 4시
면접 일정 관련하여 조율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보내드린 문자에 회신으로 내용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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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에 지원했던 이유 역시 아주 간단했다. 공고가 올라온 곳 중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직장이라니.. 면접은 4시였으나, 2시가 조금 넘어 집에서 미리 나와 집 앞에 있는 따릉이를 결제하고 페달을 밟았다. 마침 회사 바로 앞에도 따릉이 정거장이 있어서 회사 앞에서 내렸다. 시간을 보니 2시 26분.. 대략 20분 정도가 소요됐다. 근처에 좋은 카페가 있는지 지도를 켜 주변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회사 건물 바로 건너편에 좋아 보이는 카페가 보였다. 그곳에서 면접시간을 기다리면서 여유롭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이곳에 다니게 되면 작은 접이식 자전거를 장만해서 타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은 성수동에 커다란 지식산업센터 건물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작은 상가 건물 안에 위치한 소규모 아뜰리에에서만 직장생활을 해서 그런지, 입구에 회전문이 있고 엘리베이터가, 심지어 두 대나 있는 건물이 내가 다닐 직장이 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신기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뒤, 복도 끝에 있던 건축사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회사의 홈페이지 안에 소개된 프로젝트들을 보며 상상했던 만큼의 큰 규모의 사무실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밝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T회사의 분위기가 밝은 청록색이고 R회사는 황토색이었다면, 이곳은 밝은 하늘색에 가까웠다. 따로 실이 구분되어 있진 않았지만 파티션으로 적절히 자리가 나뉘어 있었고, 회사 입구 앞에 있는 회의 테이블 앞에는 빔프로젝트와 여느 화이트보드 절반정도 되는 크기의 미디어가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직원의 수는 대략 6-7명 정도. 한 직원 분의 안내를 받아 회의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은 벽으로 구분되어있진 않았지만 적절한 요소들로 그 경계가 나뉘어 있었다. 회의실의 한쪽은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새하얀 벽이었고, 반대편에는 커다란 화분과 식물들로 쌓여있었다. 화분 너머로는 은은한 클래식 노랫소리와 누군가의 전화통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대표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몇 분 뒤 전화통화 소리가 끊기고 수첩과 펜을 가지고 오신 대표님과 면접을 시작했다. 우선 A대표님은 먼 길 오느라 고맙다는 말과 함께(멀진 않았지만) A건축사사무소에 대한 소개를 했다. A건축사사무소는 조금 특수한 기능의 건물들을 위주로 설계하는 곳이었다. 일종의 전문시설이라, 일반적인 건축물들과는 달리 동선과 실의 배치 같은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정답이 있는 프로젝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작은 규모의 사무실에서 이런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따로 묻진 않았다. 주택도 가끔씩 진행한다고 하는데 아마 전문시설 임원분들의 자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A대표님은 내가 R회사를 나온 뒤 짧게 진행했던 건축설계는 아닌 건축프로젝트에 대해서 꽤나 흥미로워하셨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흥미를 끄는 포트폴리오를 가졌다는 것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있냐는 질문에, 만약 내가 입사하게 되면 해야 할 프로젝트들이 뭔지 여쭤봤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부담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 웃으면서 면접을 진행하던 중에 대표님은 나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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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포트폴리오를 보니까 직장에서보다 학생 때 더 열심히 하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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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어떤 부분에서는 맞는 이야기이고, 어떤 의미로는 틀린 이야기이다.
우선, 직장을 다닐 때보다 학부시절의 프로젝트가 더 재미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건축주나 발주처가 존재하는 실제 설계보다는 학부시절에 스스로 건축주가 되어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디자인에 대한 애정이 더 컸을 법도 하다. 직장을 다니면서 만드는 작업물은 내 맘대로 진행할 수도 없다. 따라서 '학생 때 더 열심히 한 것 같다'라는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 일 수 있다.
하지만 한 학기 내내 하나의 프로젝트를 했던 학부프로젝트의 퀄리티와, 한 달 안에 무조건 끝내야만 했던 프로젝트를 절댓값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내가 제출했던 학부 프로젝트의 포트폴리오 이미지는 다시 취업준비를 하면서, 학부시절 작업했던 기존의 이미지를 수정한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를 보고 학부 때 더 열심히 한 것 같다는 말의 진실은 나의 온전한 프로젝트일 순 없는 회사에서 했던 프로젝트의 이미지보다, 나의 온전한 프로젝트의 디자인 실력이 더 뛰어난 것 같네요?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 당시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A대표님은 다음 주 중으로 계약조건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제시한 연봉이나 조건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으니, 보고 한번 고민해 보라고 말이다. 어차피 그렇게 회사 내규의 연봉으로 다시 제시할 거라면, 처음부터 왜 희망연봉을 적어내라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진 않는다. 단순히 생각했을 때 본인들이 생각한 연봉보다 적으면 자신이 생각한 금액보다는 낮지만 희망연봉보다는 조금 높여서 맞춰주고 생각했던 연봉보다 희망연봉이 높으면 원래 자신들이 생각한 연봉으로 제시하기 위함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이유라면 너무 속이 보이는 방식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만든 회사가 아니고서야 평생직장이 없는 시대에 그런 식의 운영은 애사심은커녕 회사에 대한 신뢰를 오히려 더 떨어뜨리는 일이지 않을까. 업무에 대한 면접은 그렇게 끝이 나고 대표님은 내가 최근에 했던 건축설계가 아닌 프로젝트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면서 앞으로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주신 명함을 받고 나왔다.
이후에 계약을 제시하는 문자가 아닌, 함께 하게 되지 못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면접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명함을 주었다는 것은 앞으로 한동안은 만나지 않을 사이라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함은 입사하면 언제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아 명함은 버렸다.
그렇게 두 번째 퇴사 후의 첫 번째 면접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