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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Jan 17. 2020

[독서하는 삶 #2] 모스크바의 신사

백작과 함께 보낸 일주일

 '에이모 토울스' 작가의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분량 때문에 읽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에이모 토울스는 나에게 생소한 작가였다. 책 속에 나온 러시아 역사와 요리,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에 대한 묘사, 실존하는 메트로폴 호텔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훌륭해 당연히 러시아 작가일 줄 알았다. 놀랍게도 에이모 토울스는 미국 보스턴 출신의 작가였다. 투자전문가로 20년 동안 일하다가 40대 후반 나이에 첫 소설 <우아한 연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을 훨씬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한 작품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가 필요하다는 에이모 토울스는 이제 세 번째 소설을 집필 중에 있다고 한다.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그 엄청난 시간을 공들였기 때문에 미국 출신 작가임에도 1922년부터 1954년까지 러시아 메트로폴 호텔 안에서 일어나는 일대기를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놀라울 따름이다. 앞으로 그의 이름을 더 자주 접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알렉산드로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부터 시작된다. 레닌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들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기존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많은 귀족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았다.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 우연한 계기로 썼던 시 한 편이 혁명의 불씨를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는 이유로 총살은 면하게 된다. 대신 평생 모스카바에 위치한 메트로폴 호텔 안에서 가택 연금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백작은 비록 평생 메트로폴 호텔에 갇히게 되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가택연금은 국외 추방해 버리면 그곳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 국내에 머물게 하면서 최대한 고통을 주는 형벌로 고안한 것이다. 그런데 백작은 사실 메트로폴 호텔 안에서도 잘 먹고 잘 산다. 메트로폴 호텔은 매우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곳이다. 비록 잠은 호텔 구석 다락방에서 자지만 음식을 먹고, 이발을 하고, 로비에서 신문도 읽을 수 있다. 백작은 돈도 많고 호텔 안에서 친구도 많이 사귄다. 책을 읽는 내내 백작이 맛있는 요리를 먹고 와인도 마시는 등 현실의 나보다 잘 사는 게 부러웠던 순간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백작처럼 호텔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몇 년은 정말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호텔 밖의 세상이 눈 앞에 훤히 보이는데 내 발로 걸어 나갈 자유가 없다는 구속감이 언젠간 나를 옭아맬 것만 같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종 신사의 자세를 유지하며 호텔 안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가며 생활하는 백작이 대단해 보였다. (물론 그에게도 위기는 몇 번 있었지만)   


 <모스크바의 신사>에는 여러 백작의 친구들이 나온다. 든든한 호텔 안의 지원군 안드레이(호텔 내 고급식당 지배인)와 에밀(식당 주방장), 호텔의 재봉사 마리나, 백작의 어릴 적부터 친구이자 변화하는 세태 속 시인의 고뇌를 잊지 않았던 미시카, 우연한 계기로 친해진 공산당 간부 오시프와 미국인 리처드 밴더 와일까지. 페이지가 700쪽이 넘다 보니 정말 많이 나온다. 그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건 백작과 관련된 3명의 여자 니나, 안나, 소피아이다. 


 니나는 백작이 처음으로 친해진 호텔 친구로 당시 니나는 어린 꼬마 숙녀였다. 니나는 현명한 백작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로 똘똘한 면모가 있는 친구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호텔 마스터키로 호텔의 숨겨진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백작은 호텔에 오래 갇힌 신세로 니나를 만날 당시만 해도 자신이 호텔에서 모르는 곳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나의 마스터키는 백작을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공간으로 이끈다.

 누구나 한 가지 우물을 계속 파다 보면 스스로 마스터가 된 듯한 느낌을 느끼게 된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 일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 나타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을 제안한다면 그 순간 내 사고가 익숙함에 속아 갇혀있었음을 깨닫고 새로 보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지평이 넓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백작이 오랜 호텔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가 니나의 마스터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할 때보다 새로 알아갈게 더 많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 더 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예시로 들면 끝판왕까지 어떻게 깨는지 다 아는 게임은 시시해서 오래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재미와 발견을 주는 게임이라면? 게임에 중독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안나는 러시아 유명 배우로 등장한다. 그는 백작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안나와 백작의 관계는 참 묘하다. 잘 나가는 여배우 안나가 굳이 호텔에 갇힌 백작을 만난 이유가 무엇인진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 일관성 있게 신사다운 백작의 모습에 반했거나, 자신을 유명 배우가 아닌 한 여자로 봐주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시간이 오래 흐른 뒤 등장하는데, 그녀는 니나의 딸이다. 성인이 되고 공산당원으로 독립한 니나가 결혼한 뒤 낳은 딸인데 모종의 이유로 백작한테 맡기게 된다. 백작이 낳지는 않았지만 소피아는 딸과 다름없는 존재다. 소피아는 어린 니나와는 좀 다른 이유로 백작을 당황시키고 또 매료시킨다. 그리고 소피아는 백작이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한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상황과 자신만 생각해도 되는 상황이 있다면 같은 인간이라도 두 가지 상황에서 상반된 태도와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동안엔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지만 움직여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여 편안한 삶도 좋지만, 만약 그 삶이 목적이 없는 삶이라면 그 편안함이 오래갈 수 없다. 우리는 아마 삶의 원동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 목적이 무엇을 쫓느냐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만 일단 무엇에 관한 부분은 논외로 하겠다. 소피아는 백작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백작과 함께 보낸 일주일은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즐거웠다. 백작의 삶을 속속들이 엿보면서 내가 마치 백작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백작이 내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유쾌한 문학적 경험들을 맛보았다. 책이 너무 재밌다 보니까 따로 기록도 안 하고 술술 읽어나갔는데 그래서 그런지 읽으면서 무수한 생각들을 했었는데 그것들이 다 정리가 안 되는 것 같다. 아마 책을 다시 읽으면서 찬찬히 이야기하면 이 책 하나로도 글 몇 편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백작을 보내주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최악이었지만 그 상황을 최대로 개선해 멋진 삶을 살아낸 백작을 보며 용기도 많이 얻었다. 그는 메트로폴 호텔 안에만 있어야 했지만 나는 호텔 안에만 머물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런 자유의 환경이 열려있는데 용기가 없어 안에만 머무는 삶은 이제 지양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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