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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Jan 14. 2020

감나무의 7 덕(德)

추운 저녁 감나무 아래에서

어느 추운 저녁, 밖을 오래도록 서성거릴 일이 있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거닐다가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자라난 쉼터에 도착했다.

<감나무 쉼터>라는 명칭의 그곳엔 감나무의 7 덕(德)에 대한 설명이 돌판에 적혀 있었다.

감나무는 예로부터 7 덕(德)이 있다고 했다. 7 덕(德)은 수명이 길고, 그늘이 짙으며,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없으며, 단풍이 아름답고 열매가 맛있으며 낙엽이 훌륭한 거름이 된다. 감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 없는 가을 최고의 나무이다.

감나무의 7가지 덕에 대한 글을 읽는 순간, 이것이 누구를 위한 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이란 자고로

1. 도덕적ㆍ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 2.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출처 국어사전)               

이런 뜻이다.

감나무가 마치 성인(聖人)처럼 도덕적 이상을 실현해 나갈리는 없을 테고, 아마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란 두 번째 뜻에서 '덕'이란 표현을 쓴 것 같다.  


쉼터에서 이 글을 읽을 때 날도 추웠지만

내 마음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나는 감나무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1. 수명이 길다.
2. 그늘이 짙다.
3. 새가 둥지를 틀지 않는다.
4. 벌레가 없다.

감나무는 혼자서 강한 햇볕을 다 받아 낸다.

햇볕이 강할수록 감나무는 더 짙은 그늘을 만들어 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감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다.

감나무에겐 둥지를 틀러 오는 새도, 함께 계절을 보낼 벌레도 없다.

그런데 수명마저 길다. 그 긴 세월 감나무는 혼자다.

감나무의 짙은 그늘이 유독 더 어둡게 느껴졌다.


5. 단풍이 아름답다
6. 열매가 맛있다.
7. 낙엽은 훌륭한 거름이 된다.


감나무는 아낌없이 다 준다.

아름다운 단풍이란 볼거리를 제공하고 맛있는 열매도 준다.

떨어지는 낙엽마저 훌륭한 거름으로 탄생한다.

이 중에 감나무 자신을 위한 이로움은 없어 보인다.


버릴 것 하나 없는 가을 최고의 나무라는 찬사를 듣지만

정작 이 찬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감나무의 덕은 누구를 위한 덕인가 하는 생각처럼 말이다.

답은 뻔하다.

감나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다.

어쩌면 감나무의 7 덕은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보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부여한

덕일지도 모른다.

감나무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면,

감나무의 7 덕을 보고

'웃기고 자빠졌네'

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때 내 마음이 그랬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군가를 위해 아낌없이 다 주고

홀로 외로이 지내는 불쌍한 영혼을

'덕'이란 말로 치장해주는 것 같았다.


괜스레 배배 꼬여 감나무에게 한 소리 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도 주기 싫으면 네 거 주지 마!

수명도 길면서 왜 자꾸 혼자 있어!

너를 위해서 살아!"


다른 날에 또 이 감나무 쉼터에 오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 내 마음에 찬바람이 아닌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있다면

나는 감나무의 덕을 진정한 미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날 나의 사색은 쉼터에 한 아주머니가 데리고 산책 나온 강아지의 짖음으로

막을 내렸다. 실로 적절한 타이밍의 마무리였다.

추운 저녁 감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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