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sommar, 2019 - 아리 에스터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공포 장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차세대 거장을 꼽으라고 한다면 본인은 주저 없이 3명의 감독 이름을 바로 언급할 수 있다. <겟 아웃>과 <어스>의 ‘조던 필’, <더 위치>와 <라이트하우스>의 ‘로버트 에거스’, <유전>과 <미드소마>의 ‘아리 에스터’가 바로 그 이름들이다. 저번 주에 쓴 <겟 아웃> 글에서도 다뤘던 것처럼 흑인인 조던 필은 주로 자신의 인종과 관련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공포영화를 선보인다. 로버트 에거스와 아리 에스터는 둘 다 초자연적인 소재를 활용해 영화를 만든다. 차이가 있다면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들이 조금 더 몽환적인 판타지 색채를 보인다는 점이다. 아리 에스터는 장편 데뷔작인 <유전>에서 ‘오컬트 장르(초자연의 신비를 다루는 장르)’를 훌륭하게 연출했다는 평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과 사운드 삽입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점프 스케어’와 같은 쉽고 익숙한 길을 가지 않고, 느리지만 지속적인 음산함과 불쾌감으로 감정을 쌓고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는 ‘탐정 장르 영화’와 같은 서사구조로 관객에게 향하는 정보를 통제하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효과적으로 발산한다. 이는 감독의 후속작인 <미드소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이렇게 영화적인 기법이나 서사구조도 훌륭하지만, 이 글에선 <미드소마>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 영화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영화에서 돋보이는 두 개의 키워드는 공동체(가족)와 이데올로기(전통, 관습)이다. <미드소마>는 주인공 ‘대니(플로렌스 퓨)’가 남자 친구인 ‘크리스티안(잭 레이너)’과 친구들이 논문 연구를 위해 떠나는 여행에 함께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이 가는 곳은 ‘스웨덴 헬싱글란드’ 지방의 ‘호르가’라는 마을이었고 낮이 가장 긴 여름에 열리는 축제인 ‘하지(미드소마)제’가 이곳에서 9일간 개최된다는 이야기에 연구 목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호르가라는 마을은 작은 공동체로 서로서로 가족처럼 생각하는 친밀한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다 알고 외지인은 바로 티가 난다. 이들은 아이도 공동으로 양육하고 식사도 다 함께하고 일정한 연령대의 사람들끼리 모여 한 공간에서 잠을 잔다. 대니와 친구들, 그리고 그들처럼 축제를 구경 온 영국인 ‘사이먼’, ‘코니’는 이 공동체에 섞일 수 없는 철저한 외지인 포지션에 있다. 다만 주인공 대니는 이 공동체에 섞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복선이 영화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대니는 조울증을 앓던 동생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대니를 제외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 평소 가족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크리스티안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풀었던 대니는 이 사건 이후 더 전적으로 크리스티안만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이런 대니에게 마음이 떠난 지 오래됐고 그는 대니가 자신의 아픔을 맡길 만큼 좋은 남자 친구가 아니었다. 대니 일행을 호르가로 데려오는 데 큰 공을 세운 크리스티안의 친구 ‘펠레’는 커플의 이런 사연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펠레는 그녀가 자신의 아픔을 ‘가족’ 같은 호르가 공동체에서 회복하길 바란다는 속내를 은연중에 내비친다. 다시 말해 펠레는 대니에게서 외지인이 내부인으로 융화될 가능성을 봤다고도 할 수 있다.
가족 같은 소규모 공동체라 할지라도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전통과 관습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동체만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 호르가의 이데올로기는 다소 야만적이고 주술적으로 보인다. 호르가 사람들은 생애주기를 계절처럼 나눠 총 4단계(18년 단위)로 보고 마지막 단계의 72세에 이르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에테수트파(Ättestupa)’라는 의식을 치른다. 에테수트파를 진행하기 전에 축복, 기도 등 의식적인 절차를 수행하며 마치 에테수트파의 대상자들이 자발적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포장을 하려 하지만, 이는 모두 눈속임일 뿐 문명인의 관점에서 야만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대상은 주로 외지인이다)에게 자신의 음모와 생리혈을 먹이고 공동체의 여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가지기 위해 치르는 일종의 ‘성의식’은 주술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낯설고 이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특징들 때문에 외지인의 관점에선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쉽사리 동화될 수 없다. 하지만 대니 일행은 이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상황이다. ‘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라는 우리나라에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라고 번역되는 세계적인 속담이 있다. 대니 일행은 호르가에 왔으니 호르가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자에겐 공포(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니 일행과 비슷하게 호르가에 방문한 사이먼과 코니는 에테수트파 의식을 보고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호르가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나려고 했다. 크리스티안의 친구 중 ‘마크’는 호르가가 신성하게 여기는 고목에 소변을 본다. 또 다른 친구 ‘조시’는 논문 연구를 위해 호르가가 신성하게 여기는 ‘루비 라드르’라는 경전을 몰래 촬영한다. 마크와 조시는 호르가가 신성하게 여기는 대상을 존중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시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면 크리스티안과 대니가 남는다. 크리스티안은 공동체 여성인 ‘마야’와 성의식을 치르고 딱히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지 못한 외부인이었다. 크리스티안은 혈족을 유지하기 위해 외지인과 관계를 맺는 호르가의 전통에 이용당한 희생제물일 뿐이다. 그는 성의식 전이나 후나 똑같이 공동체에 겉도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식사 씬에서 홀로 사복을 입고 있는 크리스티안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귀결되어야 하는 공동체로선 튀어나온 못 같은 존재이다. 이데올로기에 반(反) 하지 않더라도 융화되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도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대니는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다. 물론 대니도 처음엔 에테수투파를 보며 이상함과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크리스티안에게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아마 크리스티안이 착한 남자 친구여서 대니의 말을 듣고 함께 그곳을 떠났다면 그 과정에서 대니 역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겠다는 크리스티안을 두고 대니는 혼자 떠나지 않았고 공동체에 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공동체가 먹을 요리를 만들고 5월의 여왕을 선정하는 춤에 참여한다. 멈추지 않는 춤을 추는 과정에서 그녀는 가족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와 공허가 아물고 채워지는 경험을 한다. 함께 춤을 추는 여성과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음에도 둘이 언어를 초월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공동체의 이데올로기에 속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에 단지 속한 것을 넘어 5월의 여왕이 된다. 공동체 안의 주요한 위치에 올라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 된 것이다. 대니는 신께 바칠 마지막 제물로 자신의 새로운 가족이 된 공동체 사람이 아닌 ‘외지인’ 크리스티안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그동안 남자 친구임에도 그녀를 힘들게 했고 마야와 관계를 맺는 성의식도 목격했기에 크리스티안에 대한 복수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본인은 남녀 관계보다 공동체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일어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싶다.
공동체 사람들은 마치 한 몸인 듯이 감정을 공유하는 관습이 있다. 에테수트파에서 발부터 떨어져 아직 죽지 않은 노인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 때, 성의식에서 신음이 난무할 때, 성의식을 목격한 대니가 슬픔의 절규를 내뱉을 때 그 옆에 갤러리처럼 있던 공동체 사람들은 이들의 감정에 반응하고 마치 공감한다는 듯이 함께 같은 감정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영화의 마지막, 불에 타는 고통에 제물로 바쳐진 호르가 사내가 비명을 지를 때 역시 공동체 사람들은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제 그 구성원이 된 대니도 그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새로운 가족 같은 공동체의 이데올로기에 속한 대니는 더는 괴롭지 않다. 크리스티안이 불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대니가 웃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