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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Oct 29. 2022

niji(무지개)

대학원생 에세이 4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번 학기 모든 발제를 10월 초에 마쳤다. 10~11월은 입시철이라 조교 일로 바쁘고 11~12월은 기말 페이퍼를 써야 해서 발제를 좀 일찍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다만 2주 동안 발제 4개를 연달아할 생각은 없었다. 2개는 나의 선택이지만, 공교롭게 랜덤으로 배정된 발제가 한주에 몰리면서 완성된 대환장 파티였다. 조교 근무랑 수업 준비를 병행하며 발제까지 준비하느라 9월 내내 앓는 소리만 했던 거 같다. 결과적으로 퀄리티는 아쉽지만 어찌어찌 적당한 선에서 모든 발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퀄리티까지 잡으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한 발제 횟수인 것 같다.


 발제가 끝나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부국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먼 거리와 비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영화도 잘 보고 좋은 시간 보내고 올라왔는데 올라온 후로는 쭉 컨디션의 난조를 겪었다. 하루 종일 피곤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공부는 집중이 안됐다. 덩달아 입시철이 다가오고 조교일이 늘어났다. 출근해서는 거의 뇌를 비우고 서류에 파묻혀 있고 퇴근하고 공부하려고 자리 잡으면 멍하고 힘들고 졸렸다. 그 상태가 어언 3주는 넘게 지속된 거 같다. 가끔은 사무실 사람들, 동기들,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할 때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뭔가 전환이 필요한 때였다. 아마 연이은 발제로 에너지를 다 쏟고 그다음 바로 영화제 일정을 소화한 게 무리가 온 거 같다. 더불어 중요한 일들이 끝났기에 약간의 번아웃도 왔던 거 같다.


 놀랍게도 영화보다 음악이 내 상태 회복에 큰 도움이 됐다. 이번 주 월요일인가 수업 과제를 위해 책상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평소 듣던 음악들을 재생했다. 계절을 타지도 않으면서 '가을이니까~' 하면서 인디 발라드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워둔 상태였다. 노래는 감성적이고 좋은데 어딘가 흥이 나진 않았다. 좀 신나게 과제를 하고 싶은 마음에 신나는 노래를 찾다 중학교 때 매일 같이 들었던 펑크록 계통의 노래들을 기억해냈다. 내한 공연을 갔을 정도로 좋아했던 sum41이 먼저 떠올라 추억의 노래들을 들었다. sum41이 2007년 'underclass hero'앨범 발매 때 내한공연을 왔었고 그때 그 앨범을 사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앨범 수록곡 중에선 'with me'란 노래를 좋아했었다. 한참 듣다 보니 추억이 주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미 과제는 물 건너 간 상태였고 나는 계속 'still waiting' 'over my head' 등 sum41의 대표곡들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때 문뜩 sum41 이전에 나의 심장을 뛰게 해 주었던 그룹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Ellegarden(엘르가든)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해서 앨범 CD를 전부 사모았던 일본 펑크 록 밴드다. 그런데 보컬인 호소미 타케시가 영어 발음을 기깔나게 잘해 영어노래만 들으면 엘르가든이 일본 밴드라는 걸 눈치채기 힘들 정도다. 한국에 제일 잘 알려진 노래는 광고에도 나왔던 'marry me'다. 나랑 결혼해달라는 로맨틱한 노래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슬픈 노래였다. 여하튼 나는 'marry me' 보다도 'no.13'이나 'salmander' 같은 노래를 더 좋아했다. 엘르가든은 전반적으로 밝고 신나는 그룹사운드 속에 때로는 묘한 슬픔,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담고 있다. 그래서 가사의 뜻을 전혀 모르고 찾을 수도 없던 시기에 멜로만 듣고도 이 노래가 밝지만 어딘가 슬프고 마음을 울린다는 거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초중교 학교 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랑 싸우거나 혹 짝사랑의 아픔을 겪었다거나 그 어린 나이에 인생의 고단함을 느낄 때 나는 모두 다 잠든 밤 거실 한편에 있는 CD플레이어 앞으로 이부자리를 끌고 갔다. 그리고 혹시나 부모님이 깨실까 플레이어 소리를 최소로 한 채 엘르가든 음악을 틀어두고 잠을 잤다. mp3가 있긴 했지만, 나는 CD로 듣는 음질이 다운로드한 음원 파일보다 좋았다. 누워서 노래를 듣고 있으면 힘들고 안 좋은 기억은 사라지고 세상에 나와 엘르가든의 멜로디만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15년이 넘은 지금, 이제는 CD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엘르가든의 전집을 재생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했다. 특정한 기억들보단 그 당시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들이 올라왔다. 눈물이 맺히는 감정이었지만 흐를 정도로 깊은 감정은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그날 오랜만에 잠을 잘 잤다. 잠을 잘 자니 피곤함도 덜하고 에너지도 좀 생기는 거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가 맑아져서 좋았다. 오늘도 엘르가든 노래를 들으며 홍대에서 열리는 '서울 동물영화제'를 가고 있다. 'niji(무지개)'라는 일본어 노래다. 엘르가든 노래를 한창 좋아할 때 뜻도 모르면서 좋아했던 노래다. 그때 영어까지는 어떻게든 뜻을 해석해볼 수 있었지만, 일본어는 누가 지식in에 가사 해석을 올려주지 않는 한 뜻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검색을 통해 대략의 뜻은 안다.


積み重ねた思い出とか
겹쳐 쌓인 추억이

音を立てて崩れたって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고 해도

僕らはまた 今日を記憶に
우리들은 다시 오늘을 기억으로

変えていける

바꿔갈 수 있어


엘르가든 'niji(무지개)' 후렴구 (해석 벅스뮤직)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차창에 비친 햇살이 아름답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얼마 만에 자연을 통해 감정을 느껴보는 것인지.. 여전히 내 귀에는 엘르가든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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