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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me Apr 03. 2023

쎄미 라이터

게으르게 쓰고 열심히 읽는 사람

글은 어떤 사람들이 쓰나요?


어떤 사람이 글을 쓰는가? 난 어떤 글을 써야 하지? 최근에는 거의 하지 않는 생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치열하게 노트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했던 고민이었다. 특별히 할 말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야기를 가득 품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찌나 부럽던지. 그렇다, 내 꿈은 글쟁이였다.

심플한 우드톤의 서재 안, 큰 책장 앞에서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진지하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나의 모습. 작가들이 많이 쓴다던 블랙윙 연필을 적당히 날카롭게 다듬어내고 백지에 거창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거지. 인문, 사회, 마케팅 등 취향을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운 방대한 종류의 책들이 꽂혀있는 커다란 책장.  우드 냄새를 은은하게 품고 있는 서재이지만, 내 후각은 이미 익숙해져 이제 향이 느껴지지 않겠지. 머리를 식히기 위해 큰 창문을 열어보면, 울창하고 파릇한 나무가 한눈에 펼쳐지고 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뜨거운 국화차를 우리기 시작할 거야.

대략적으로 이런 삶을 살 거라고 상상했다. 아니다, 실은 지금도 조금은... 아니, 완전히 그렇다.

고등학교 때부터 작가를 꿈꾸던 나는 좋은 교수님이 있는 문예창작학과에 가서 글을 공부하고 싶다는 낭만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했다. 허나 역시 너무 아름다운 것은 유효 기간이 짧은 법이다. 문예창작학과에 가서 글을 쓰자마자 느낀 건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인간은 아주 많으며, 나의 작은 소질이 발하는 빛은 너무 미미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돈이 없었으며 집 안의 기둥이라고 믿었던 아빠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외국과 전혀 인연도 없이 외국계 광고 에이전시에 들어가게 되었고, 하찮은 외국어 수준으로 글로벌을 외치는 마케터가 되었다.

그냥 그 길이 있어서 걷는 거야


이렇게 살아온 28년 삶을 풀어놓고 보니 참 멋이 없다. 꽤나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들에 발을 들여놓으며 살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 외국어 수준만큼 하찮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 꿈은 글쟁이였는데 지금은 멀어져서 정말 어쩌다 가끔 글을 쓰고, 데이터와 숫자와 상사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내 낭만과는 다르게 인생이 흘러가는듯 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클수록 불행하다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내 낭만은 언제든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글쟁이 아닌가?

예전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 '글'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글을 쓰려고 하면 언제든 쓸 수 있으며 노트북이나 백지, 연필만 있으면 가능한 것 아닌가. 어찌나 돈이 덜 들고 자유로운 낭만인지. 박봉 월급을 받는 직장인은 정말 다행이라며 남몰래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요즘에는 어떤 글을 쓰지, 라는 고민은 거의 하지 않고 산다. 어떤 글이든 쓰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한' 글보다는 '글' 자체에 가치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꽤나 진지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진지한 고민도 단순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하는 사람들이 좋으며 유쾌함은 깊은 사유만큼이나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도 대단한 통찰이 있었다면 이보다는 더 내면이 깊은 사람이 되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부모 돈으로 문예창작학과까지나 가서 할 말이냐, 라며 누가 따진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노랫말 중 하나는 장기하의 '그건 네 생각이고' 가사의 일부분이다. '그 길이 내 길이라 가는 게 아니고, 그냥 그 길이 있으니까 가는 거야', '조곤조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면 이렇게 말해버려, 그건 네 생각이고'.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질 만큼 개운한 노랫말 아닌가. 진정 남의 말과 반응에 과민할 만큼 의식하며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에게 유쾌하게 건네는 강력한 위로의 노래이다.

요즘 읽는 책은 참으로 잡다하다. 예전에 많이 읽었던 소설은 세 달에 한두 번 읽을 정도로 적게 읽게 되었고, 비즈니스 관련 도서, 감성적인 에세이, 잡지, 트렌드 도서 등을 읽는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을 때는 얇은 굵기의 에세이를 읽고 열심히 살고 싶을 때는 트렌드 도서를 읽는다. 나름 마케터이기 때문에 직업적 의무감에 읽는 책도 꽤나 된다. 대학을 졸업하며 책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자가 되고자 했다. 여전히 책을 고를 때 전혀 의무감 없이 책을 고르는 건 아니지만, 흥미가 없으면 금방 떨쳐내고 다른 재미난 책으로 갈아타니 나름 유희로서 책을 읽는 자유로운 독자가 된 셈이다.

그게 나의 낭만이다. 자유롭고 유희를 위해 평생 도서를 탐닉하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믿으며 사는 것. 가벼운 문장으로 웃음 끝에 씁쓸함을 남기는 일. 날카롭고 냉장한 문장 속에 뜨거운 위로를 남기는 일. 그런 글을 남기고 싶다.

'출판'이라는 울타리를 넘으면?


최근에는 다른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미래 설계는 출판사 마케팅 부서의 사원이 되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약 1년 전까지 출판사에서 근무했다. 책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알 수도 있는 나름 규모 있는 출판사였다. 거기서 출판 마케팅을 했다. 덕분에 출판 시장의 생태를 조금은 알게 되었으며 나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출판에 대해서도, 마케팅에 대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관심이 깊었던 출판사에서는 벗어났고 적성에 맞는지 의문이 들었던 마케팅은 이어가게 되었다. 출판 마케팅을 하다 보니 책에 대한 결핍이 아닌 마케팅에 대한 욕심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아니, 의문이 깊어갈수록 더 알아보고 싶어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그걸 욕심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2년 반 정도 근무했으니 길다고 할 수는 없는 기간이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일을 계속 이어갈지 아닐지에 대해서 고민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산업 밖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출판사는 정적인 산업이 맞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신념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일하는 산업의 특징은 환경이 다소 열악하는 점이다. 신념과 애정이 강하지 않으면 계속 이어가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주 출판단지'라는 곳이 따로 있을 정도로 다른 산업과 분리가 되어있는 공간적 특성과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신념에 적응하며 지내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독서를 즐기는 것과 출판 마케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출판사는 조용하지만 바쁘게 돌아간다. 현대인들은 책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아 거의 대부분은 모르지만 한 달 동안에도 수많은 신간이 탄생한다. 어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편집자와 마케터의 어깨를 펴주지만, 어떤 책은 하루에 10권도 채 팔리지 않기도 한다.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판매부수로만 종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출판사도 결국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체이기 때문에 판매부수를 무시하는 출판인은 없다. 그 신간들을 홍보하는 게 마케터의 일이다. 디지털 매체가 활성화되면서 언론이나 방송에 의지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가까이 스며들어있는 sns를 통해 홍보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오프라인 매대 홍보, 제휴 등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나는 디지털 마케팅 업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을 하며 여러 딜레마가 생겼는데, 데이터 분석을 통한 전략적인 마케팅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회사 내의 마케팅 체계의 부실함과 출판사 특유의 산업적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하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프로가 되는 일은 나의 인생 전반에 거친 정체성, 자부심, 앞으로의 밥줄이 걸린 일이었다. 출판사를 나올 때 나의 나이는 고작 27살이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며 커리어를 쌓아가기 위해, 어려서부터 어렴풋 꿈꿨던 출판사 직원으로서 이바지하는 삶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스로 가파른 '광고 에이전시'라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작, 기우뚱한 자세를 곁들인


새로운 계단 앞에 섰을 때의 나의 마음 가짐이란? 내가 회사 생활 처음도 아니고, 어디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별로 안 들었는데! 멋있는 직장인이 될 거야. 너무 뜨거운 마음가짐은 기피하는지라 적당히 미적지근한 의욕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의기양양한 속내를 감추고 입사한 나는... 계단을 오르자마자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 몸은 이 모양 이 꼴인데 계단은 왜 이렇게 갑자기 가팔라진 거지? 의욕처럼 되지도 않고 내 실력은 한없이 모자랐으니, 바로 고꾸라지기 일보 직전.

여기서 고꾸라지는 게 맞나 아니면 우선 올라가 보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약간 기우뚱한 자세로 계단을 오르는 엉거주춤한 사람의 뒷모습처럼, 나의 에이전시 직장 생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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