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초, 어느날 핸드폰에서 영문 이름이 보이며 진동이 울린다.
"여뽀세요~"
반가운 목소리 Sadia다.이제 미국으로 돌아간다며 가기전에 지난 겨울에 함께 만났던 친구들을 함께 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처음엔 사디아가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 상황과 우리가 만나서 보내는 시간을 고려하면 집에서 만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다. Sadia도 잠시 생각해보고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도 우리집에서 보기로 했다.
Sadia. 미국에서 온 친구. 흑인. 20대 중반 여성. 박효신을 보면 쓰러질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 Hitchcock, Maya Anjeloue 등의 영화, 문학 작품들을 사랑하는 친구. 2019년 처음 만난 친구. 한국생활 3년째인 친구. 다음 주면 미국으로 돌아가는 친구. 의학대학에 입학했지만 진로가 확실치 않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한국행을 택한 친구.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며, 소설가가 되겠다며 말한적도 있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기간이 좀더 짧은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친구.
처음 이 친구를 만났을 때 기억이 강렬하다. 우리는 2019년도 동네 카페에서 매주 목요일 날 언어교환을 하고 있었다. 언어교환이란 1시간 영어로 1시간 한국어로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게 다른 나라 언어로 1시간 한다는게 애초부터 불가능한 컨셉이다. 우리는 영어를 했다가 한국말을 했다가 뒤죽박죽 서로의 상황에 맞춰 이야기를 한다. 인생도 그러지 않나? 이렇게 저렇게 계획적인 것 같지만 뒤죽박죽 살아가면서 돌이켜 보면 뭔가 맞춰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나와 내 친구 Rachel(언어교환을 모임을 처음 만든 캐나다 친구)은 2층 카페에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우리를 포함해서 외국인 2~3명 한국인 2~3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1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히잡을 쓰고 까만색 피부색깔이 여자다. 등장부터 존재감이 굉장히 강했다. 의자에 앉는데 독특했다. 보통 학생들을 포함해서 여성들이 쓰는 핸드백은 꽤 소중히 다루는 편이다. 그런데 Sadia는
"Hi guys~"
미소와 함께 바닥에 자신의 가방을 던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기억 못할수도 있지만, 난 그 장면이 무척 기억이 남아서 3년뒤 송별회를 우리집에서 했을 때 Sadia에 빙의해서 그 상황을 연출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줬다. 언어교환은 카페에서도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종종 함께 피크닉을 가기도 했다. 보성 차밭에 가기도 하고, 내가 있는 광주시내에서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Sadia가 직장 문제로 경기도에 갔다가 순천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을 했다. 교직에 있으면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하는 산업에서 교직만큼 안정성과 복지를 제공하는 곳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광주에서 외국인교사 프로그램으로 왔다가 수도권 생활을 경험하고 싶어서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학원강사로 활동한 것은 대단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덕에 Sadia는 꽤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한국에서 외국인 학원강사로 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들쑥날쑥 스케줄에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들이 많고 노동강도도 높았다. 그러다가 2021년 쯤일까? 우리가 언어교환 하는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우리집에서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Sadia가 나에게 책 선물을 하나 주었다.
내가 영화제작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예전에 우리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았던, Richard Lingklater 감독의 Before Sunrise 시리즈 영화의 시나리오집을 선물해주었다. 중고책방에 놀러갔는데 보여서 내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로 된 원서를 읽는 것은 아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한글책도 그렇게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으니깐. 이 책은 정말 오랜기간동안 오랫동안 읽었다. 너무 좋아하는 감독이고, 작품이라 그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캐릭터로 빙의해서 읽어보기도 하고, 실제 영화랑 비교해보면서 읽기도 했다. 가끔 시나리오랑 실제영화랑 다를 때쯤에는 세상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나 빼고 몇명 안될거라는 생각에 괜히 짜릿하기도 하고 팬부심을 내기도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원서는 수준별로 범위와 깊이를 더해갔다. 시나리오 책이 재미는 있었지만 과정을 끝내기에 시간이 조금 길다는 생각이 들어 짧은 원서가 없을까? 함께 스터디하는 스터디원 해인샘이 추천해준 미국인 시인 Charles Bukowski의 영문버전을 읽고, 다른 영어시들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시는 암송하고 있다. 그리고 좀 더 길이와 내용을 실감나게 알고 싶어 영어에세이집을 찾는 중에 영어문화권안에서 한국문화를 이야기하는 'Crying in Hmart'(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고, 이후에는 소설에 도전해보고 싶어 모두가 다 아는 Pachinko를 읽고 있다. 지금 Pachinko를 읽고 있는 나를 보면
"영어를 정말 잘 하시나봐요?"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흠, 그냥 재밌어서요."
정도의 답변일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연적인 요소들이 일어내는 파장이 나중에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Sadia가 건넨 그 책 한권, 삶을 꽤 풍요롭게 해준듯 하다.
함께 공부했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 어떤 친구들은 언어교환 안에서 커플이 되서 결혼을 하고, 어떤 친구는 이직을 하고, 새롭게 모임에 들어오는 친구들도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굉장한 짜릿함은 아니지만 따뜻하면서 괜찮은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