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아침 해를 맞다

응답하라 멕시코, 1999년 3월 9일 & 10일

by 긍정의 힘

아침에 일찍 나와 지금은 버스터미널이다. 현지인들과 같은 버스에 몸을 싣고 같은 곳을 향해 이동하는 느낌. 난 이 느낌이 참 좋다. 생생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캔쿤(Cancun)을 가기 위해서는 멕시코시티(Mexico City)까지 6시간을 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캔쿤까지 22시간을 더. 빠듯한 예산 때문에 버스에서 28시간을 보내야 한다. 버스를 탄다는 것이 두려워진다. 고단한 하루가 예상된다. 지난 며칠간 이곳에서 많은 좋은 사람을 만났다. '이젠 누구를 만나게 될까?' 내심 기대된다.

과나후와토에서 멕시코시티로 가는 버스는 시골 구석구석을 누볐다. 어릴 적 어머니, 아버지 따라서 시골 할머니 집을 가던 정경과 비슷하다.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리던 버스. 그때도 난 그랬다.

“아, 멀미 난다.”

저녁 7시 50분 멕시코시티에 도착. 확실히 대도시라서 그런지 사람도 북적거리고 인상도 굳어 있는 듯하다. 위험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실제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멕시코시티에는 유명한 유적지가 많이 있는 곳이다. 전에 과달라하라에서 만났던 멕시코시티에 거주 중인 멕시칸 커플과 만날 생각도 했지만 왠지 대도시의 여행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아무리 볼거리가 많아도 사람들과 정을 느낄 수 없는 곳이라면 관광지로서의 매력 또한 덜하기 때문이다.

캔쿤행 버스를 타기 위해 ‘따뽀(TAPO, Terminal de Autobuses de Pasajeros de Oriente)'라는 버스터미널로 가야 한다. 따뽀까지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역을 찾았다.

멕시코시티 지하철 역은 서울의 여느 지하철역 이상으로 붐빈다. 사람들로 빼곡하다. 표를 사기 위해 창구에서 큰소리로 외친다.


“따뽀”

순간 내 주변에 정적이 감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곳 멕시코는 동양인 관광객이 극히 드물다. 그런 곳에 한 동양인이 그것도 커다란 배낭과 작은 배낭을 몸 앞뒤로 멘 채 큰 소리로 “따뽀”라고 외쳤으니 신기할 만도 할 것이다. 시쳇말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지하철을 타고 따뽀에 도착한다. “이럴 수가” 따뽀에 도착했건만 캔쿤 가는 버스가 없단다. 가이드북이 잘못된 것이다. 허탈하고 또 허탈하다. 잠시 어찌할 줄 몰라 대합실 기둥에 한참을 기댄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생각지도 못했는데 18시간 거리에 '채투말(Chetumal)'이란 곳이 있다고 한다. 그곳으로 우회하면 큰 시간 손실 없이 캔쿤으로 갈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채투말로 가는 버스행에 오른다.

<이틀 동안 구급맵상 1,999km를 쉬지 않고 이동했다. 20대였으니 가능했으리라. 이동하느라 찍은 사진이 전혀 없다.>

이쯤에서 호기심이 생긴다. ‘어떻게 운전사가 18시간 동안 버스를 운전할 수 있을까?’


정답은 바로 운전사가 둘이라는 것이다. 한 명은 짐칸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운전하는 식이다. 휴게실에 정차했을 때 짐칸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짐칸 안에는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덜컹거리는 길이 편할 리 없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도 난 평소처럼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모두들 내가 신기한가 보다. 손짓 발짓으로 대화도 나누고 놀라운 붙임성으로 사과 등 간식도 얻어먹었다. 나의 근성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어릴 적 고향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넌 어디다 내놔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그 말을 몸소 실현 중이다.

그렇게 버스 안에서 시간이 흐른다.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다. 마치 이 모든 게 현지 체험형 여행상품처럼 느껴진다.


밤이 늦어서야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얼마나 잤을까? 눈이 부셔온다. 해가 뜬것이다. 그렇게 나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버스 안에서 맞았다.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재밌고 신기하다. 버스가 잠시 정류장에 멈춰 선다.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느릿느릿 화장실에 다녀온다. 그리고 정차한 곳에 되돌아온다.


'앗, 없다. 버스가 없다. 사라졌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여권을 포함한 모든 짐이 버스 안에 있기에 더 다급하다. 미친 듯이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래도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여권은 어떻게 재발급받지?', '지금 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지?', '집에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부쓰, 부쓰" (그들은 버스를 부쓰라 부른다), "채투말, 채투말"을 미친 듯이 외친다. 나의 완벽한 스페인어 구사에 주위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바로 알아챈다. 고맙게도 그중 한 명이 다가와 버스가 지금 주유 중이라고 알려준다.


'오, 감사합니다.' 십 년 감수했다란 말을 비로소 실감한다. 알고 보니 아침식사를 위해 버스가 40분간 정차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난 우여곡절 끝에 채투말이란 곳에 도착한다.


채투말에서 멕시코에 장기간 여행 중인 한 캐나다인을 만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채투말은 과테말라의 접경 지역으로 무역을 위한 도시이지 관광지는 아니라며 마야 유적지로 유명한 '쁠라야 델 까르멘(Playa del Carman)' 방문을 추천해줬다.


그의 말을 따라 캔쿤으로 가기 전에 쁠라야 델 까르멘이란 곳을 먼저 방문하기로 계획을 수정한다. 어차피 계획다운 계획이 있지도 않은 터였다. 다행히 쁠라야 델 까르멘은 캔쿤 가는 길목에 있기에 전체 일정에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꼭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5시간을 버스에서 보내야 한다. 또 이동이다. 쁠라야 델 까르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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