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하늘 아래 울려 퍼진 애국가
응답하라 멕시코, 1999년 3월 11일
새벽 12시 반, 장장 30시간의 버스여행 끝에 목적지인 쁠라야 델 까르멘에 도착한다. "몸이 축난다 축나."
미리 점찍어뒀던 유스호스텔로 곧장 향한다. '이게 또 웬일인가?' 또 방이 없단다. 난감하다.
유스호스텔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중, 길을 지나던 얼큰하게 술이 오른 한 현지인이 자신이 저렴한 호텔을 안내해준다고 제안한다.
그분을 따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 호텔 저 호텔을 헤맸다. 관광지라 그런지 모든 호텔의 방 가격이 만만치 않다. 모두 예산 밖이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니 새벽 2시다.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다. 길 안내해주신 분을 보내고 덩그러니 혼자 남는다. 총 30시간의 버스여행 후 1시간 반 가량을 걸으니 지칠 대로 지친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길 한가운데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용기인지 객기인지 갑자기 노래하고 싶어 진다. 선곡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냥 입을 벌리고 생각나는 아무 노래나 생목에 힘을 실어 내보낸다.
<딱 이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노래를 불렀다. 주변에서 사진 요청이 쇄도했고 그중 한 명에게 부탁하여 독사진 한컷>"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
애국가다. 애국가가 내 입에서 나온 것이다. '애국가라니, 왜 하필 애국가일까?' 나도 모르겠다. 마치 누가 내 등 뒤의 스위치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 노래가 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그냥 그렇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2절까지 불렀다. 뿌듯하다. 가슴이 벅차다. 내친김에 4절까지 완창 해야겠다. 하지만 3절과 4절의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소용없다. 가사가 좀 틀리면 어떠리. 난 3절과 4절을 1절과 2절에서 단어를 빌려와 재활용하여 기어이 4절까지 완창하고야 만다.
애국가에 이어 듀스의 '사랑, 두려움', 신성우의 '서시' 등 아는 노래를 총동원한다. 대중가요가 바닥날 즈음 이젠 동요로 갈아탄다. '산토끼',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른다. 가사가 쉬워서 좋다. 길 한가운데서 이렇게 노래를 불러도 어차피 난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다. 점점 흥이 더해진다.
사실 난 노래를 잘하는 편이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음악시간 가창 실기시험에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결과는 꼴찌에서 두 번째. 이후 난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남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이런 내가 자발적으로, 그것도 비록 수가 극히 적지만 전 세계 관광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간 노래를 못해 주눅 들었던 순간이 지금 상황과 대비된다. 마치 일탈하는 기분이다. 희열이 느껴진다.
그러는 동안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현지인은 물론이고 유럽 및 북미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버스킹이라기엔 노래를 너무 못하고, 어쨌든 내 정체가 궁금할 만도 할 것이다. 그중 몇몇이 왜 혼자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묻는다.
'왜냐고? 왜일까?'
사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피곤한데 잘 곳은 없고, 주변이 깜깜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그저 막막하고, 그래서 이 막막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시계를 본다. 벌써 새벽 두 시 반.
'굳이 방을 잡아 돈을 써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노숙이다.'
막상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제는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내 노래를 즐기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또 반시간이 흐른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게 다가온다. 좀 전에 만났던 유럽인이다. 그는 내게 새벽 6시까지 운영한다는 펍을 소개하며 해 뜰 때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알려줬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나 말해준 펍으로 향한다. 십여분을 걸어가니 도착한다. 지척이다. 진작에 알았으면 바로 이곳에 왔을 것을. 펍 안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렸고 나도 그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미국 여행사에서 일한다는 한 멕시칸을 만났다.
“Where are you staying tonight?”
이미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tonight 이라니.
난 그의 물음에, "I don’t know. Maybe here or at the bus terminal?”이라고 답한다.
“You are crazy.”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면서 그는 친절하게도 본인이 묵는 호텔에서 아침까지 쉬었다 가라고 제안한다.
여행사에서 일하는 덕에 그의 거처는 매우 럭셔리한 호텔이라는 것이다. 그의 제안에 순간 멈칫해진다.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
‘이게 웬 떡이지?’, ‘혹시 게이면 어떡하지?’
잠시 고민 후 오케이를 외쳤다. 함께 바를 나서며 그가 한마디 한다.
“You are going to see a different world.”
이 말을 호텔에 도착해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호텔은 정말이지 영화에서만 보던 그런 곳이다. 호텔은 코발트빛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야자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캐리비언 해변을 등지고 있다. 실외수영장, 테니스장, 농구장 등 편의시설도 훌륭하다.
방도 고층으로 된 건물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방갈로 스타일의 나무로 엮은 집들이 넓은 뜰에 띄엄띄엄 널려 있다. 그야말로 아주 안락하고 편안한 그러면서도 화려한 호텔이다. 그렇게 피곤했던 밤, 아니 새벽을 생각지도 않게 내 인생의 가장 럭셔리한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아침 일찍, 다시는 내 평생에 묵을 기회가 오지 않을 듯한 호텔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가 찾던 아주 싼 방이 있는, 아니 텐트가 있는 곳에 숙소를 잡았다. 해변가에 수십여동 놓인 허름한 텐트 중 하나가 내 숙소다. 실로 ‘체험, 극과 극’이 아닐 수 없다.
<우측으로 보이는 텐트 중 하나가 내 숙소다.>나만의 숙소인 텐트에서 한가롭고 여유로운 낮잠을 즐겼다. 비록 군데군데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간 흔적이 있는 텐트지만 나만의 공간이라 편안하다. 사실 어젯밤에 묵었던 호텔은 굉장히 화려했지만 얹혀 자는 입장인 데다 한 침대를 둘이 나눠 써서 불편했었다.
여느 때처럼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묵은 곳에는 우루과이, 영국, 캐나다, 이집트 등에서 온 또래의 여행객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들과 같이 대낮부터 테킬라를 오렌지 주스와 섞어 마신다. 역시 낮술은 진리다.
오후에는 나무에 열려있는 코코아를 따먹고 옅은 파란색으로 시작해서 진한 파란색으로 변하는 맑디맑은 캐리비언 비치에서 수영을 하며 평화로운 오후를 보냈다.
저녁엔 우루과이 친구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감상한다. 아름다운 곳의 아름다운 밤이다. 그리고 새로 만난 친구들이 있어 더 행복하다.
<텐트촌 친구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