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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사만화 Jun 25. 2020

어느 편집자의 퀴어 문학 사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박상영, 김봉곤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현란한 덕질을 한 

시기와 대상을 묻는다면

부끄럽게도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돌아보건대 지금까지 그렇게 맹렬하게 누군가를

그렇게 '유사 연애'의 감정으로

좋아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고작 열 몇 살인 나는 그에게

고사리 같은 용돈 전체를 받쳤고

TV와 라디오 생방을 사수하기 위해

숙제할 시간까지 할애했다.



열 몇 살인 나에게는 그는 현재이자 미래,

인생 그 자체였다.


그 대상이 누군고 하니,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서태지'.



당시에는 무가지, 월간 잡지 등이 성행했고,

동네 문방구에서 그것들을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나는 서태지만 나왔다 하면 달려가

내 용돈을 기꺼이 헌납하였고,

수집 파일은 도톰하게 대여섯 개는 족히 되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며

내가 서태지에 시들해져

여전히 그를 파고 있는 다른 팬에게 팔 때

당시 큰 돈이었던 3만 원 정도 받았을

정도의 퀄리티였다.)


창피한 과거지만 그것들을 사기 위해

부모님의 주머니를 털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 내 소원은 서태지와의 결혼,

서태지와의 포옹도 아니었다.

콘서트에 한 번 가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자녀의 덕질 활동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신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늘 녹화 비디오로만 만족해야 했다.


한번은 '발해를 꿈꾸며' 발매와 동시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인가 진행되는

콘서트 실황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밤 11시에 편성되어 있어

나는 본방 사수를 하지 못했고,

담 날 아침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에게  

부랴부랴 달려가 녹화 테이프를 빌리기도 했다.


내가 조숙해서 문화 대통령이었던 그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컨디션이 아닌

'얼굴'을 좋아했다.


하앟고, 고운 얼굴.

은테 안경이 주는 조화.


이후에도 줄곧 나는 서태지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했다. 연예인은 물론

실존 인물로도 그런 외모를 선호했다.


(물론 지금의 남친은

전혀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쩝.)


서태지 이후 나의 덕질 DNA를 자극하는

어떤 대상은 없었다. 중간중간 드라마 속

캐릭터를 좋아하긴 했어도

드라마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종식되었다.


그렇게 살아오던 어느 날,

회사에 BL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BL 책이 팬덤으로 책이 날개 돋히듯 팔리자

내게 BL를 기획해봐라, 라는 하명이 떨어진 거다.




하지만 그게 뒤늦게 판다고 될 일인가.

그랬다면 내가 베스트셀러를 얼마나 많이 냈겠는가.


서브 컬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했지만

BL 세계, 그것도 19금은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쓸데없는 내 뿌리 깊은 기독교적 세계관도

허들이었다.


(교회 안 나가는 애들이 꼭 이럼...)


전자기기를 기반으로 하는 웹소설의 짧은 문체,

캐릭터 중심의 전개도 왜인지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퀴어 문학 먼저 파자는 마음에

그렇게 운명적으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읽게 되었다.



나는 콜미를 읽으며

앨리오의 휘몰아치는 감정에 한 배를 탄 뒤

올리버를 절절히 갈망하게 되었다.


여기서 올리버파냐, 앨리오파냐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나는 절대 마성, 애간장 녹이는 올리버파다.


(앨리오의 감정이 더 동화되어

그 시각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던 것 같다.

그래서 올리버에 더 자극점이 높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앨리오는 올리버가 자신의 집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다.


안 그럴 재간이 있나.

린넨 셔프 단추를 막 세 개까지 풀고

태닝을 해 반짝이는 가슴팍을 드러내는데.


(침 좀 닦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지만

그 안에는 분명 혼돈이 존재했다.


그래서 올리버는 앨리오에게 받아줄 듯

거리를 두는 행동을 취하게 되고

이에 앨리오는 거의 이성을 잃어

그가 벗어놓은 수영복을 남몰래 입어보며

그를 느낀다.


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점점 더 주체할 수 없이 커진다.


재밌는 것은 그렇게 이루어진

두 사람의 첫 신이었다.

절정에 치닫은 두 사람의 감정이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첫 성교에 고통을 느끼는 앨리오를 포착한다.


나는 이 대목이 놀라웠다.

앨리오가 남성과의 첫 잠자리에서

온전히 오르가즘을 느꼈다면

그건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하여간 사랑이란 다분히 그런 면모가 있다.

상대에 대한 환상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성일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서로를 원해서일까.

미완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후속권인 <파인드 미>에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간만에 나의 덕질력을 깨워

단행본-후속권-오디오북-원서-OST까지

구매하는 돈지랄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덕질의 제1 원천은 역시

'굿즈는 가져야 맛이다!'가 아닌가.

단언컨대 은혜로운 소비였다!


콜 미, 이후 국내 퀴어 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국내 퀴어 문학은 콜 미와 다른 화법을

가지고 있었다.


퀴어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일 수도 있을 테고,

콜미의 경우 완전한 픽션이지만

국내 퀴어 문학의 경우 저자의 이야기에

절반쯤 다리를 걸치고 있어서 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읽은 박상영과 김봉곤 작가의 소설

모두, 가족의 모습, 그들이 소수자를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엄마가 청소년인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가 하면,

김봉곤의 <그런 생활>에서는

아들이 쓴 소설로 아들이 퀴어인 것을 알게 된

엄마의 강한 부정이 담겨 있다.


"너 진짜로 그 애랑 그런 생활을 했니?"

하고 묻는 식의.


콜미에서 아들이 올리버를 사랑하는 것을 눈치챈

아버지에게 앨리오에게 하는 말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 행복이 하길 바란다고 말하는 그 성숙함.


나는 우리네 퀴어 문학을 읽으면서

퀴어의 사랑 만큼이나

'한국 가족의 지긋지긋함'을 목도했다.


나이를 먹어도 꼭두각시이길 바라는

부모의 강압은

그것이 퀴어일지라도

혹은 비혼일지라도

혹은 아무 것도 아닐지라도

끊임없이 계속 재생산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생활>을 읽은 다음 날, 가족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가족 모임에서 나는

갱판을 쳐대고 말았다.

뒷자리에서 창문을 열고

혼자 흐르는 눈물을 닦지를 않나,

화목한 가족이기 바라는 나이 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에 덧없음을 속으로 한탄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하지 않나.


왜 그랬을까.


나는 소설을 읽은 후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그들에 대한 증오가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만나서 그들을 불편하게 하리라는 것도.




왜 모두 화목한 가족이어야 할까.

그리고 지내 온 세월 동안

우리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그들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덕질에서 퀴어로,

퀴어에서 가족 이야기로

넘어간 오늘의 일기는

여기까지다.


<그런 생활>에 대한 리뷰는

아래의 유튜브에도 담겨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MOoOnBNl6E&t=2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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