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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사만화 Jul 14. 2020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시인선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읽고




얼마 전 제목에 이끌려 시집 하나를 샀다. 최근에 봤던 책들의 제목 중에 단연 최고였다. “제주에서 살고 술은 약해요”라니!     


작중 화자가 누구인지 너무 궁금하게 하는, 대체 이 메시지를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는 이원하 시인의 첫 시집이다. 국문학과에서 줄곧 읽어오던 묵직한 시와는 사뭇 다른 감각적인 리듬감이 돋보이는 시선(選)이었다.      


특히 제목을 짓는 감각은 거의 동물적으로 보일 만큼 탁월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내가 나를 기다리다 내가 오면 다시 나를 보낼 것 같아’

‘서운한 감정은 잠시라도 졸거나 쉬지 않네요’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등등     





대부분의 시에서 제주의 풍경이 펼쳐진다. 푸른 바다와 짠내, 그리고 도시를 뒤로 하고 제주에 온 젊은이들의 회한이. 그리고 제주에 살게 되면서 뭇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갈구가 느껴진다.      


혼자 제주도에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둘레길 7코스에서 벗어나 음식점을 찾는 와중에 한 여자분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멀찍이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인은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하였고, 현지 주민과 섞여 사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렇구나, 하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나의 여정에 함께하고 싶은 기색을 역력히 비쳤다. 나는 혼자 있고 싶었고, 그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뭇의 기운과 뭇의 사람이 그리운 섬사람,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기억한다.     


물론 나는 그녀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다.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못내 잊히지 않는다. (그러다 9코스에서 우연히 또 만나서 기겁하여 돌아선 기억이...)     


나는 이원하 작가의 시집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섬은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이다. 그 고립은 자아를 찾기 위함도 되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보내는 그리움의 편지는, 말이 된다.      


실제로 저자는 6월에 발표한 산문집에서 ‘그’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처음엔 시를 쓰기 위해 무작정 제주에 갔고 그곳에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되었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한 사람만 그리워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제주, 사랑하는 ‘그’에게 마음이 붙박여 있는 제주를 떠나보면 달라질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기대하고 실망했다가도 다시 “판이 뒤집히는 날이 올거라”라 긍정한다. 시인은 ‘그’에게 끌려다니기보다는 그를 쫓아다닌다고 말하며 자신의 사랑에 주체성을 보인다. _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보도자료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책 말미에 고백하기에 이른다.      


“인생에는 여러 굴곡이 있겠지만, 내 사랑은 직선이에요.”

“고백은 내 입술에 살아요.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나는 그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를 감추고 싶은 거예요. 곁에 두고 나만 보고 싶어요.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알지만, 모든 사랑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이기심을 빼면 남는 건 없다고도 생각해요.”




     

이러한 자기 사랑에 대한 고백을 보건대, 저자는 아직 젊고 찬란해 보인다. 알 수 없는 ‘그’를 향한 직진은 끝내 실패하더라도 투명한 눈물 한 방울과 함께 날아갈 것만 같다. 그만큼 저자의 어법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이라면, 연인에게 이 산문집을 선물해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원하 시인은 글 만큼이나 이력도 재밌다. 통상 작가들의 코스인 국어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았다. 미용고를 졸업해 미용실 스태프로 일했고, 영화 ‘아가씨’에 뒷모습이 살짝 등장하는 보조 연기자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8년에 신춘문예에 당선해 이십 대 중반, 늦다면 늦은 때에 문학을 만나 시를 쓰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 산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언가가 다르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우리에게 신선함을 준다. 마치 제주도에서 한 달 살고 돌아온 친구의 까뭇까뭇한 피부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젊음 같은.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_「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전문          




*유튜브 브이로그 여자일기를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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