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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r 05. 2020

부끄러운 육식 생활 : 수치를 끝없이 껴안는 삶

2월의 글,  <수치>에 대하여

지금으로선 믿기 어렵지만, 한때는 삼겹살을 먹지 못했다. 유년시절 우리 집에서는 고깃집 외식 대신 아빠가 직접 고기를 구워 주시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삼겹살에 심하게 체해 호되게 고생을 했고, 그 후로 돼지 고기를 오래도록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몸에 각인된 탓인지 어쩌다 한 입 먹게 되더라도 도통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 다시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때를 기점으로 나는 다시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 되었고, 삼겹살 특유의 기름진 살코기와 술 한 잔이 주는 즐거움에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화 <옥자>(2017)는 산골 소녀 미자가 빼앗긴 슈퍼 돼지 옥자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미자가 겪는 지난한 사투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결말에 다다르면, 이 영화가 겨누고 있는 문제가 바로 공장식 축산 시스템임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옥자를 본 관객 중 다수는 ‘더 이상 고기를 먹을 수가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많은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르는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생산돼 이곳까지 오게 되는지를.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호들갑스럽게 조조를 보러 갔던 나 역시 영화의 메시지와 해당 시스템의 문제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상영 직후 출출했던 내가 편의점에 들어가 사 먹은 것은 싸구려 돈육이 들어간 소시지였다. 적어도 내 세상은 바뀐 게 없었다.





간밤에 번지점프대에서 살아있는 돼지를 매달아 떨어뜨리는 학대 영상을 보게 됐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았다. 로프에 묵인 채 고공에서 떨어진 돼지는 두려움에 떨며 괴이한 비명을 질렀다.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참기 어려운 분노와 불편함에 휩싸인 채 반대 서명을 모으는 해외 웹사이트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 열심히 번역 어플을 사용해가며 서명을 했다. 내 이름 석자를 적은 서명이 작은 도움이 되어 생명을 함부로 대한 사람들을 부디 처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득, 마음이 뜨끔해졌다. 내가 소비해 온 수많은 고기들. 고깃덩어리가 되기 직전 하나의 생명이었을 동물들은 도대체 뭐가 다른지 자신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눈앞에 다가온 죽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상 속 돼지처럼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질렀을 텐데. 공장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수많은 돼지와 소 그리고 닭의 모습을 떠올렸다. 온 사방에서 울려 대는 동족의 비명과 울음에 둘러싸인 채, 그들은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며 ‘절망’이라는 감정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이용하는 업체 대부분은 상품을 감싼 포장지에 자연에서 뛰노는 동물 사진을 삽입한다. 좀 더 신선해 보이기 위한 마케팅 측면에서의 이유도 있겠으나 해당 고기가 인도적인 방식으로 생산됐다고 소비자의 눈을 살짝 가려주기 위함이라는 게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 사진 속 모습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몇 없을 것이다.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저 자신의 편의를 위해 현실을 외면할 뿐이다. 나 역시 그중 하나라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세상에서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 안온한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이 무엇을 짓밟으며 영위되고 있는지를 굳이 들여다 보고자 하는 이타적인 관심, 누군가가 보여주지 않으려는 거대한 사실을 감당할 용기, 이후 포기해야 할 무언가를 감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들. 현실은 바뀐 게 없고, 나는 여전히 비겁하고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 수치심이야말로 결국 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구원하는 감정이라고 믿는다. 수많은 진실과 마주하고 이대로 멈춰 있지 않기 위해, 나는 매 순간 끝없는 수치심을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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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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