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당 심한기 Feb 16. 2024

무당의 히말라야 (네팔) 일기
PROLOG  

               히말라야 이야기를 시작하며

무당의 히말라야 네팔 일기 

    PROLOG      

 히말라야 네팔을 만난 지 2024년 올해로 20년이 넘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초대하여 히말라야 네팔을 여행하는 ‘오~ 히말라야’ 여행과 한국과 네팔의 청소년, 청년, 예술가, 활동가들과의 교류를 시작한지도 20년을 채워가고 있다. 무당이라는 별칭은 내가 사랑하는 히말라야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결(접신/接神) 하겠다는 자발적 의지로 만든 별칭이다. 이제 시작하려는 글은 그동안 히말라야 네팔에 대한 어설픈 판단과 편견 그리고 그들의 입장을 담아내지 못했던 실수와 오류를 통해 차근차근 쌓아왔던 반성과 성찰의 글이다. 또한 온라인 검색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히말라야 네팔에 대한 일방적이고 감정적인 수많은 정보와 글들에 대한 ‘경고’와 ‘새로고침’을 위한 글이기도 하다. 몇 년 전 히말라야 네팔의 진정한 모습을 전하기 위한 책을 쓰기 시작했으나 코로나 상황으로 멈춰 있었다가 올해 17번째 오 히말라야 여행(부탄 히말라야, 네팔 히말라야)의 에너지로 그동안의 글(무당의 히말라야 일기)들을 정리하고 추가하여 이곳 ‘브런치’에 연재를 시작하려 한다. 당연히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서의 주관적 시선을 넘어서지는 못하겠지만 히말라야에 기대어 살아가는 네팔(가끔 부탄까지)을 여행하려는 사람 또는 이미 이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보이지 않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전해보려 한다. 


히말라야 네팔 그리고 Good Karma의 시작”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잘 노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미래에 대한 투자임을 10대 시절부터 깨달았다. 물론 부모님이나 주변의 시선들은 정반대였기에 적지 않은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음악(Rock & blues)을 포기했다. 대신 또 다른 10대들이 내가 겪었던 부당한 과정을 반복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스스로의 삶을 기획하는 청소년과 청년’을 응원하고 돕는 일을 시작한지 33년째이다. 대학졸업 후 청소년 영역에서는 나름 근사한 직장으로 여기는 ‘서울시청소년수련관’을 입사 하루 만에 때려치우고(정장을 입어야 하고, 노조가입을 하지 않겠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기에..) 나와 비슷한 ‘똘끼’를 가진 동기 3명과 지금의 ‘품’청소년문화공동체를 만들었다.       

                                                                                                  

음악으로 살아가는 길은 포기했지만 나의 일상 속에 음악은 여전하다. (백세밴드 공연 중) 

공공의 지원이나 공간도 없이 오롯한 동기와 의지 또는 분명 아프고 힘들면서도 ‘이것이 진짜 멋진 인생이고 나는 힘들지 않아!’라는 스스로의 최면으로 매일 매일을 달려갔다. 이미 숨이 막혀옴을 감지 못하다가 막연한 동경의 나라 인도, 네팔, 티베트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생애 첫 배낭여행지는 인도였다. 핑크시티 자이푸르를 시작으로 파트나, 아그라, 카주라호 등 누구나 가보는 여행을 하며 북인도 사람들이 던져대는 재미나지만 피곤한 시선을 뒤로하고 네팔의 룸비니를 거쳐 포카라로 넘어갔다. 그리고 늘 꿈꾸고 있었던 히말라야와의 첫 마주하기를 시작했다. 짧은 5일간의 푼힐 트레킹이었지만 그동안 감지하지 못했던 내 몸과 정신의 투털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시적 환청’이려니 가볍게 흘려보냈다. 하지만 점점 선명한 환청이 이어지면서 분명 내 안으로부터 시작된 스스로의 ‘말걸기’임을 알아차렸다.      


마지막 날 담푸스(Dhampus)로 내려가는 길...  

작고 소박한 길 한 귀퉁이에 살짝 숨어있던 제비꽃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풀석 주저 앉았다. 하늘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제비꽃은 환생한 심한기가 되어 “그만 달려가기를 멈추고 숨을 좀 쉬어보셔요”라고 말을 했고 그 순간부터 해가 질 때까지 펑펑 울어 버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기에 한없이 울고 난 후 그 제비꽃에서 약속을 하나 해버렸다. 언젠가 다시 찾아와 온몸으로 히말라야를 만나보리라....라고....      

20년 만에 다시 찾은 담푸스 (16TH 오히말라야 여행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히말라야와 네팔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히말라야를 온몸으로 담기 위해 안나푸르나 종주와 티베트 여행을 계획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2004년 봄 나는 다시 히말라야 네팔로 돌아왔고 안나푸르나 종주를 시작했다. 다행히 ‘아름다운재단’의 ‘공익 활동가 여행지원 프로젝트’에 선정이 되어 걱정했던 경비를 지원받았기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가이드와 포터 없이 5권의 책을 포함한 무지한 짐싸기 덕에 대략 20키로가 넘은 배낭을 짊어지고 “베시사하르-탈-차메-피상-브라가-마낭-토롱패디-묵디나트-마르파-가사-나야풀-포카라”까지 22박 23일의 경외롭고, 행복하고, 너덜너덜한 여행을 마쳤다. 누군가가 히말라야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추천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두 만날 수 있고, 드넓은 초원과 숨 막히는 정글숲은 물론 무릎까지 빠져드는 눈길과 삭막한 아름다움을 지닌 칼리칸다키(Kali Gandaki) 계곡까지...한숨에 담기 어려운 풍경과 산자락 사람들의 일상과 종교를 모두 마주할 수 있는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길이다.      

20키로 쯤 되는 배낭 & 토롱패스는 넘운 후 여유롭게 까끄베니에서

안나푸르나 종주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린 후 또다시 히말라야로 이어지는 티베트 여행을 떠났다. 오래된 이야기 ‘슈얌부 푸라나(Swayambhu Purana)“에서 전하는 붓다와 제자들의 히말라야로 향한 고귀한 발걸음은 아니었지만 막연한 동경과 상상 그리고 히말라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나만의 발걸음이었다. 2004년 즈음 티베트는 중국의 불손한 향기가 덜 했기에 다행히도 원형의 티베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안나푸르나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히말라야로의 여행은 앞으로만 향했던 나의 운명의 기막힌 전환기를 마주하게 했다. 히말라야를 가로질러 티베트로 달리는 미니버스 안에서 만난 장부 세르파(Jangbu Sherpa)는 오로지 자신의 몸과 안전만을 챙기는 한국, 미국 등의 다른 여행자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고산병에 걸린 여행자에게 휴대용 산소병을 건네주고, 숙소에 도착해서도 마늘스프를 끓여주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갔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고 라사(Lhasa)까지 이동하는 3일간의 여정 동안 묘한 동질감이 통했는지 우리는 여행친구가 되었다.      

티베트 여행 중 운명적인 장부 세르파(JANGBU SHERPA)와의 만남. 

그와의 만남이 ”히말라야 네팔 그리고 Good Karma’의 시작이었다.

티베트 여행을 마치고 카트만두로 돌아와 장부의 집에 초대를 받았고, 함께 한국식당에도 갔고 그렇게 우리는 유쾌한 형과 아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베레스트 골리)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작은 엔지오 단체를 만들고 싶어했다. 나 역시 청소년을 만나고 있는 에너지는 이미 충만했고 이미 히말라야 네팔에 취해있었기에 여행이 아닌 일과 일상의 시간들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2년 후 우리는 카트만두 타멜(Thamel) 골목 어귀에 네팔품(NGO Nepal Pum) 간판을 달게 되었다.   

타멜(THAMEL) 골목에 첫 문을 연 NGO PUM NEPA. 

  

이렇게 시작된 히말라야 네팔과의 인연은 나의 일과 일상, 나의 몸과 정신, 나의 배움과 지혜, 나의 관계와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모든 것들을 흔들고 붙잡고 연결시켜가고 있다. 20년 가까이 흘려보낸 시간 속에는 오만하고, 무지했던 오류의 과정들이 적지 않았다. 한네팔 문화예술교육 워크숍, 한네팔 청소년(청년) 문화교류 프로젝트, 도서관과 마을 프로젝트, 지진돕기 프로젝트 등 한국에서의 버릇처럼 상상했던 모든 것들을 빠른 속도로 해치워버리려는 못된 추진력을 포기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히말라야가 건네주는 반성과 성찰의 소리와 솔직하게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담푸스에서 만난 제비꽃의 경고를 무시한 인과(因果)이기도 하지만 진정성을 담아보려는 노력들의 결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네팔의 청년 예술가와 함께 한 한.네팔 청소년 교류 프로젝트 중  


그럼에도 히말라야 네팔과의 인연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참으로 많다. 

우렁찬 랑탕 계곡((Langtang Vally)의 물소리와 가슴을 헤집어 파고드는 랑시샤카르카(Langsishakharka)의 풍경을 10번 넘게 마주했고, 에베레스트 아마다블람(AmaDablam)의 신비한 기지개를 간직했고, 헬람부(helambu)에 숨겨진 밀라레빠(milarepa/티베트 불교 까큐빠의 수행자)의 기도소리를 들었고, 틈만 나면 까끄베니(Kagbeni)와 묵디나트(Muktinath) 사원으로 기도-소풍을 떠났고, 관광객이 찾지 않는 네팔 서부 무구 꺼널리(Mugu Kanali) 마을극단을 만나러 갔고, 로만탕(Lo Mantang /무스탕 왕국의 수도)의 모레 언덕과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동굴에 룽다(Lungta/기도깃발)를 바칠 수 있었기에 다시 일어나 자연과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금씩 가슴을 열어낼 수 있었다. 결국 사람과 자연과 사랑의 이야기는 같은 뿌리와 줄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스탕 왕국의 수도 로만땅의 룽다. 

     

‘자랑질 또는 아는 척’을 위한 단순한 정보와 지식 또는 경험담은 ‘이제-그만’... 

티베트 불교와 힌두교의 세계관 속에 담긴 진심의 역사와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과 이야기를 담아보고 기억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기에 희망이 더 크다.     


학자의 지식과 견해 또는 객관적 읽어내기 등을 감히 흉내 낼 수는 없겠지만 그곳의 자연과 사람들과 함께 해왔던 짧지 않은 서사가 이어지고 있고, 여전히 히말라야 네팔을 사랑하고 있고, 여전히 그곳의 신화와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일상을 탐구하고 나눠보고 있기에... 


                                 ‘무당의 히말라야 일기’를 평온한 마음으로 나눠보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문화기획의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