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일부가 된 해금과의 만남 1
운명같은 만남
2010년의 어느 날, 운명은 드라마 한 편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방영 중이던 드라마 <동이>에 푹 빠져 살았다. 한효주(동이)와 지진희(숙종)의 사랑은 그 자체로 로맨틱하고도 애틋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더 깊이 흔든 것은 드라마 속 주인공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던 '해금'의 선율이었다.
그전까지 내게 해금은 그저 깽깽거리는, 조금은 '허접한' 소리를 내는 악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 해금 소리는 환상적이었고, 그 선율은 편견에 갇혀 있던 내 귀를 단번에 깨워주었다. 그 소리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신기하게도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말처럼, 기적 같은 우연이 이어졌다. 집 앞 피아노 학원에 해금 전공 선생님이 계셨고, 동생이 다니던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의 따님 또한 그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는 연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라며 엄마를 졸라 마침내 첫 선생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수줍은 입문자였던 내게 정성 어린 편지와 함께 본인이 활동하시던 퓨전 국악그룹 <미지>의 앨범을 선물해 주셨다. 얼마 뒤 동생네 학교에 초청된 그분들의 공연을 직접 관람하며, 나는 해금을 배우기도 전에 그 매력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호사를 누렸다.
두 번째 터닝포인트, 하얀 눈 위에서의 깨달음
처음 나를 보신 선생님은 걱정이 앞서셨다고 한다.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로 해금의 팽팽한 안줄과 바깥줄을 견뎌낼 아귀힘이 있을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손의 힘을 기르는 과정은 고됐지만, 재미있었다. 운지법을 익히고 처음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던 날, 정확한 음정을 짚어내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우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일상과 종교를 넘나드는 대화를 나누며 1년 넘게 깊은 유대감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영어 공부를 위해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해금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덕분에 현지 한인교회에서 특송을 할 기회가 종종 있었고, 그곳에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한 음악 가족을 만났다.
기타 치는 남편, 피아노 치는 아내, 그리고 다재다능한 아들까지. 그분들은 나를 기꺼이 무대로 이끌어주셨다. 크리스마스 쇼핑몰 연주부터 자선 행사까지, 낯선 타국 땅에서 해금이라는 악기를 알릴 수 있도록 소중한 기회를 열어주셨다.
어느 눈 내리던 겨울날, 연주복을 선물해 주시겠다며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신 그 집사님 댁 언덕 위 경관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썰매를 타며 웃음꽃을 피우는 동안, 기타를 치시던 집사님은 조용히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셨다. 백혈병 투병 중 기적적으로 골수 이식을 받아 일상을 되찾았던 이야기, 병동에서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기타를 들고 찬양을 부르며 절망뿐이던 공간을 희망으로 물들였던 기억들….
이야기를 이어가던 집사님은 눈가가 촉촉해진 채 내게 말씀하셨다.
“하은아, 너는 관객 앞에서 연주할 때 제일 행복해 보여. 화려한 무대도 좋지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곳에서 연주하는 기쁨과 감사함이 얼마나 큰지 아니?”
그 한마디가 내 운명을 바꿔놓았다. 나에게 주신 이 달란트를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곳에 사용하고 싶다는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좁은 문, 그리고 예상치 못한 길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해금 연주자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응원보다 우려 섞인 반대였다. 바이올린 천재라 불리며 한예종 영재원을 다니던 선배 언니는 공부 잘하던 애가 왜 갑자기 험난한 음악의 길을 가려 하느냐며 훈계했고, (언니 미안^^)
자선 단체 아카데미에서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조차 "이 길은 너무 좁다"며 만류하셨다.
당시에는 '내가 정말 소질이 없나' 싶어 마음이 한없이 위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견뎌내기에 전공자의 길은 상상 이상으로 외롭고 거칠었기 때문임을.
그렇게 1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좁고 험난한 길을 묵묵히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우연처럼 찾아온 또 한 번의 전환점.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회사를 만나게 된 것은 내 해금 인생의 또 다른 서막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