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봤지만, 이제 저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눈과 생명을 바꿨다고 생각하시죠.”
의사의 그 한마디에 엄마는 무너져 내렸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건만, 결과는 딸이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선고였다.
나는 예정보다 훨씬 이른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다. 쌍둥이 동생과 함께였다. 당시만 해도 미숙아를 살려내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던 동생은 결국 한 달을 버티다 세상을 떠났고, 나는 끈질기게 생명줄을 부여잡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눈이 문제였다. 시각장애 판정이라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엄마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매일 같이 하나님께 우리 모녀를 거두어달라고 기도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클래식 음악만 틀어놓고 잠으로 도피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의 시간 동안 흐르던 음악이, 내가 세상과 만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장난감 피아노를 사주셨다. 나는 가르쳐준 적도 없는 동요를 듣고 곧잘 따라 쳤다. 지금도 기억을 더듬어보면 누군가에게 계이름을 배운 기억이 없다. 그저 엄마에게 말을 배우듯, 자연스럽게 소리들이 내 몸에 체득되었을 뿐이었다.
놀란 엄마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음대 교수를 찾아갔고, 내가 ‘절대음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반이 너무 많아 시각장애인이 다루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는 피아노보다는, 몸에 밀착해 연주하는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를 가르쳐보라는 조언도 함께였다.
‘절대음감’이라는 그 한마디는 엄마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되었다. 네 살 때부터 나는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엄청난 조기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피아노는 자연스럽게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특히 클래식 선율 속에 있으면 마치 나만의 아늑한 보금자리에 들어온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피아노가 좋았던 이유는 명확했다. 누르는 즉시 내가 원하는 음이 정직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비록 소리 내지 않고 정확한 건반을 찾아내는 과정은 여전히 스트레스였지만, 그럼에도 피아노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맹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에서 절대음감은 그리 특별한 재능도 아니었다. 오히려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이 별종처럼 느껴질 정도로 흔했다. 덕분에 나는 모든 사람이 자동차 경적이나 초인종 소리를 ‘음’으로 듣는 줄 알고 자랐다. 주변에는 악기를 곧잘 다루는 선배들이 넘쳐났고, 음악은 우리들의 장난감이자 일상이었다.
하지만 재능은 때로 독이 되어 돌아왔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내가 절대음감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기대를 거셨다. 한 번 들은 곡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절대음감이라고 해서 모든 선율을 단번에 암기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당시 선생님의 과한 욕심은 어린 내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음악은 즐거운 놀이가 아닌, 틀려서는 안 되는 강박이 되어갔다.
연습에 필요한 지독한 인내심도 내게는 부족했다. 피아노 한 곡을 위해 진득하게 앉아 반복하는 과정은 고역이었고, 소리 내기조차 힘든 바이올린은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게다가 내 밑으로 동생이 둘이나 있는 집안 형편에 음악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 역시 내가 좁고 험난한 음악의 길보다는 공부를 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장래 희망은 음악가가 아닌 영어 선생님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던 내게 교사는 최고의 롤모델이었다.
만약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해금을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았다면 나는 연주자가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