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무스를 먹으려면 타힌을 대령하라?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홀로 큰 장을 보고 돌아온 우리 집 아저씨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재료 한 가지를 못 구한 것이다!
남편은 레시피에 있는 콩알 하나가 없어도 바로 나가서 사와 레시피 그. 대.로. 요리해야 하는 충실한 레시피 추종자이다. 요리를 과학으로 생각하는 여느 독일인 중 한 명으로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데 한 톨의 콩알이 빠지면 폭발에 실패하게 된다는 듯한 믿음으로 반드시 그 콩알을 획득해서 요리 속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요리를 좋아하는 만큼 장 보는 것도 좋아하기에 이 지독하게 정확한 성향이 내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가게를 백 번 들락날락 왔다 갔다 매일 가든 하루에 몇 번을 가든 난 맛있는 음식만 공수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으면 일단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다. 오늘이 바로 그날 이렸다.
장 보고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더니 ‘타힌’이라는 재료가 빠졌단다. 잊어버리고 안 사 온 것이 아니라 갔던 슈퍼에서는 팔지 않는 특이 아이템이다. 밖에 비는 주룩주룩 오고 그거 하나 달랑 사려고 남편이 다시 나가긴 귀찮고 힘들 것 같아 오랜만에 내가 가서 사 오겠다 했다(대체 난 왜 그랬을까?). 게으른 나의 작디작은 양심이 쓸데없이 작동한 것이다. 집에서 거의 바닥을 기며 나부늘보처럼 지내는 내게 이 제안은 파격적 희생을 스스로 우려낸 재앙이다.
‘고마워!’라며 점잖게 좋아하던 우리 집 아저씨는 내가 바로 출발하지 않자 점점 히터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10분에 한 번씩 ‘언제 사러가?’를 부르짖었다… 직감했다. 오늘 나에게 평온한 오전은 싹 사라졌음을. 내가 저 정체 모를 ‘타힌’을 사 올 때까지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남편은 내가 무슨 부탁을 하면 황송할만치 금세 금세 들어준다. 지하실에서 뭘 가져다 달라하면 재깍! 빨래를 걸아 달라해도 재깍! 고맙고 또 고맙다. 근데 난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다. 남편이 부탁하면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 남편을 돕고 기쁘게 해주고 싶기에 일에 자원하는 것과 진짜 그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은 다른 일이지 않나? 재깍재깍 뭘 해내는 것이 더딜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아무도 날 응원하지 않겠지?)
내 안의 청개구리는 남편이 언제 갈 거냐고 한 번씩 물을 때마다 15분씩 나가는 시간을 미룬다. 요리하고 싶어 안달 난 남편은 급기야 나의 질퍽 거림에 질려버리고 나는 그의 질기고 잦은 조름에 지쳐 차라리 집을 박차고 나가게 되는 것이 K나무늘보와 독일군 취사병의 협력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이다.
어쨌든 나를 성공적으로 조련하여 움직이게 만든 독일 취사병은 내가 구시렁거리며 잠옷에서 일상복으로 탈복 하는 동안 ‘타힌’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무엇에 필요한 재료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가끔 남편의 요리 재료 심부름을 다니는데 요리못알에 문맹인 나는 이럴 때마다 지구에 방금 상륙한 외계인이 된다. 처음에는 어떻게 생긴 지 전혀 모르는 재료를 슈퍼에 사러 가야 하는 일이 당황스러웠다. 물론 검색하면 대충 사진을 찾을 수 있지만 특정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용기의 모습이 다를 수 있고 특히
베이킹 재료 및 양념의 종류는 다언어 다문화 시대의 유럽에서 끝도 없고 한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이름만 듣고 특정한 새우 한 마리를 잡아오는 것 같은 미션이다.
오늘의 과제는 ‘타힌’을 사 오는 것. 남편이 보내준 각가지 병모양을 먼저 감식한 후 빵에 발라먹는 병들 사이에 있거나 양념통들에 있다는 조언을 간단히 들은 후 집을 나섰다.
말해준 가게를 샅샅이 뒤지고 못 찾고 마켓 직원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다른 지점으로 보내져(?) 드디어 타힌이라 쓰여있는 병을 사서 자랑스럽게 남편 앞에 갖다 바쳤다.
내가 타힌를 찾아 삼만리를 하는 동안 거품을 거둬가며 정성스레 병아리 콩을 삶고 있던 우리 집 아저씨는 나의 포획품을 보며 ‘네가 해 냈구나’ 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장 보고 와서 칭찬받는 반백살 아줌마는 세상에 나밖에 없지 싶다. 좋아해야 할는지 기막혀해야 하는 건지? 모르것다.
오늘의 메뉴는 후무스. 병아리콩을 주재료로 단백질이 풍부한 고소한 스프레드인데 빵 위에 발라 먹으면 살짝 매콤하며 이국적 향이 폴폴 나며 입맛을 당긴다. 삶은 병이리 콩을 믹서기로 갈아 쿠민, 다진 마늘, 올리브 오일, 레몬즙, 타힌 등을 섞으면 끝! 살속 깊은 곳 어디엔가 묻혀 있을 점점 사라져 가는 근육을 키우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똑바로 앉아있기도 힘들게 코어 근육이 쭉쭉 빠지고 있는 내게 매우 필요한 양식이다..
쿠민이 들어가니 카레냄새도 솔솔 나고 무엇보다 열정적인 노란색이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친근한 맛있음‘은 아니지만 중동 특유의 향내가 고숩게 나면서 아라비안나이트가 떠오르는 ‘이색적 맛있음’ 이랄까?
부슬부슬 비가 오는데 용감하게 밖에 나가 감초 같은 재료인 타힌을 공수했으니 내 지분이 꽤 큰 것 같아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은자리에서 당당하게 주인의식을 표현했다. “엄마 아빠가 만들었다”라고.
다 큰 우리 집 애들 썩소를 날리며 ‘엄마 말이 맞네, 맞아’ 맞장구를 쳐 준다. 엄마 아니었으면 오늘 아빠 숨넘어가서 오늘 우리 후무스 못 먹었지 하며…
묘한 말이다. 나도 디스하고 남편도 디스하고 한방에 둘을 다 보내버렸다. 쓰글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