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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맹 Aug 27. 2024

알프스의 비구니

아등바등 사는 게 세상이지

올라가길 잘했다. 내 근육으로 올라갔으면 보람이 백배였겠으나 지닌 근육이 비루한지라 지난 7개월 동안 열심히 산업현장에서 구르면서 번 조촐한 돈으로 플랙스! 했다. 아주 작은 플랙스~


일단 에어컨 없는 33도는 견디기 힘들어서 아무리 재미있는 걸 한다한들 에어컨만 생각나게 한다. 이 지글지글 들끓는 날 에어컨 없는 산동네애서 뭘 하면 재미가 있을까 논의하다가 식구(친구들과 여행 간 큰 아들 빼고) 만장일치로 2500미터 산꼭대기로 피신하기로 했다.


고산열차에 케이블카도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해서

비용이 (우리 식구 기준으론) 만만치 않았으나 굶어도 좋으니 시원한 데 가고 싶다 한마음  한입으로 의견이 점철되어 내친김에 바로 산꼭대기로 향했다.

올라가는 동안 3번의 케이블카는 모두 만원이었고 에어컨이 없다 보니 덥고 좁고 불편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비비대고 있다 보니 살냄새 땀냄새가 너무 나서 에어컨 없는 헬스클럽에 있는 것 같았다.


지상을 떠난 케이블카카 천천히 산등성이로 기어오르면서 발아래 마을이 점점 작아지자 그제야 속세를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샤라락 하고 풀렸다. 이 안의 모든 이들과 함께 속세를 떠나는 상상을 하면서…. 케이블카 안의 답답함이 공포로 바뀌는 상상을.

내 마음을 읽었나? 케이블카가 울렁울렁 흔들이며 죽죽 소리를 내며 올라간다. 겨울이었으면 하얀 눈에 덮인 전나무 소나무 숲으로 스키를 탔을 텐데… 시원한 생각을 하려다 보니 지난겨울의 시간들이 병풍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특히 애들 스키 가르치려 매 겨울 알프흐에 갖다 바친 목돈이 생각나 시원해지긴커녕 살짝

부화가 치민다(아… 이 갱년기).


나는 스키를 전혀 타지 못한다(여러 번 시도했다 실패했다- 롱 스토리 숄트, 넘어지면 방덩이가 커서 못 일어난다). 내가 스키를 탈 줄 모르는 것에 자격지심이 있다 보니 우리 애들은 꼭 어려서부터 배우게 하리라 결심했었다. 그리고는 매번 아이들을 겨울 스키캠프에 보냈다. 그것에 투자한 돈을 생각하면 살이 떨린다. 액수도 액수지만 나의 얄팍한 자격지심으로 너무 일찍 애들을 스키학교에 보낸 것이 부끄럽다. 조금 더 큰 후에 보냈어도 충분히 스키를 배웠을 텐데 올림픽 선수로 키울 것도 아니면서 4살부터 극성을 피웠으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아직도 스키 관광 지역에 들어오면 어디메인가 내 지분이 눈곱만치 있지 싶다. 미련 곰탱이 같은 지고…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가 어느새 정상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데 이 더위에 배낭을 메고 열심히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다 (부지런하고 의지력 충만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에게 근육의 축복이 내리리라!)

정상의 기온은 도심에 비해 10도 이상 낮고 찬 바람까지 휘휘 불어 슬금슬금 춥기까지 하다. 돌산의 울퉁불퉁한 그림자와 까마귀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면서 만들어 내는 묘한 분위기가 마치 생명의 마지노선 같아 보였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여기는 수목 한계선을

훌쩍 넘어 나무처럼 커다란 생명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잘 보면 이끼도 푸릇푸릇 자라고 진분홍색의 알프스 장미 (Rhododendron ferrugineum),  알프스 엔시안 (Gentiana alpina)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랏빛 종모양의 스노우벨 (Soldanella alpina)들이 드문 드문 있다. 스노우벨은 알프스의 눈이 녹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으로 유명한데 딸아이가 만져보려 하니 남편이 엄하게 타이른다. 알프스의 모든 야생 동식물은 꺾거나 만지거나 하면 안 된다고.


이 꽃들이 고산지대의 험난한 환경에 적응한 생존자들이라는 것이 놀랍다. 각기 다른 형태와 색깔로 엄청난 저온, 강한 자외선, 영양 부족 등을 극복하며 점점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다니 말이다. 내 새끼들도 이렇게 커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다 깜짝 놀랐다-  스키캠프 쓸데없이 일찍 보내서 돈 날리고 허영 부린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욕망의 애미다운 생각이라- 너나 잘하세요 어머니. 녜녜.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보니 집은커녕 공항도 콩알처럼 작게 보인다. 자연 앞에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들들.세상의 시름이 우습게 느껴지고 집채만큼 커다란 내 걱정거리들이 내가 만든 허상이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애들을 위해서 나의 커리어를 위해서 포기하지 못하고 덜덜 떨며 부여잡고 있는 나의 욕망도 부질없이 느껴졌다.


산꼭대기에서는 이렇게 의젓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살자 하다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 지상에 발 디디는 순간 모든 삶의 시름이 다시 그대로 찾아오겠지.


내려가서 아등바등 살기보다 보라색 방울꽃들이랑 여기서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알프스의 비구니가 되어… 하다가 이 정상에 어둠이 깔리고 까마귀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음

이건 아니쥐. 지금도 산정상이 무서워 보이는데 깜깜해지면 더욱 공포스러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난, 속세에서 속 드글드글 끓이며 욕망 덩어리로 살다 강 팔자인가 보다. 그래 생긴 데로 사는 거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35도로 활활 타는 지상으로 내려와 선술집에서 남편과 맥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더위에 겁나게 짜증 난 무서운 딸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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