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검사
날로 달로 발달하는 지피티 때문에 매일매일 새로운 격세지감을 느끼는 요즘 (즉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게 놀랍지 않다) 내게 “살다 살다…“ 라는 말을 독일 병원에서 하게 될 줄이야…
드디어 학기가 끝나 방학을 했고 예전 같으면 금쪽같은 방학에 허투루 아닌 짜임새 있게 놀아주기 위한 계획에 바로 돌입했을 것이다. 그. 러. 나. 이번 방학은 반세기 세상을 살아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그 사실을 끊임없이 국가기관에서 (혹시 내가 잊을까
싶어) 한 달이 멀다 하고 일깨워 준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독일은 나이 50이 되면 스멀스멀 편지가 날아오는데 먼저 산부인과를 가서 뭐 뭐 검사를 하고 전문센터에 가서 유방암 검사를 위한 가슴 사진을 찍어야 하고 주치의에게 가서 건강검진과 함께 장암 예방을 위한 똥검사까지… 온몸을 샅샅이 뒤집어 까라고 편지가 온다. 한꺼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잊을만하면 오고, 또 잊을만하면 또 오고 하면서 끊임없이 내 몸이 소진되어가고 있으니 더 잘못되기 전에 정비소에 가라고 보챈다. 망가지고 나면 세금 들여 고쳐줘야 하니 아까워서 그러나 우표값에 종이, 잉크 값 들여가며 반세기가 된 주인공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의사 선생님께 보내는 것이다.
좋다 그래. 내 몸을 그리 생각해 주니 가봐야지. 아무래도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가출을 하는지 몸이 갑자기 50년 묵은 물컹물컹한 묵덩어리가 돼 가는 느낌이라 어떤 의사한테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라도 찾아가서 한바탕 호소하고 싶었다. 운동 말고 약 먹고 몸에 착 달라붙는 착한 근육은 혹시 없는지 물어보고도 싶고.
국가가 내 묵덩이 같은 몸을 이리 귀하게 여겨주니 세상 병원 가는 거 제일 싫어하지만 반세기 묵은 몸뚱이 검사를 받아주러 먼저 담당의사 (하우스 닥터)를 찾았다.
나의 담당 의사는 70세가 넘으신 은퇴를 훌쩍 넘기시고 손을 벌벌 떨면서 내 혈압을 재주시던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셨다. 늘 자상하시고 내가 엄살부리면 약이며, 마사지 처방이며 해달라는 대로 다 처방해 주시는 산타할아버지 같으신 분이었다. 난 이분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넉넉함이 좋지만 의사를 만나는게 왠지 늘 불편하고 싫어서 (애도 아니고 진짜 왜 그러는건지) 삼 년에 한 번 꼴로 찾아뵈었는데 아마도 코로나 기간에 백신 맞으러 간 것이 최단기간에 이분을 가장 자주 뵀던 때였다. 대단히 잘 알거나 친한 의사는 아니었으나 먼발치서 오랫동안 초인적인 힘으로 의사직을 유지하시는 선생님을 응원하고 깊이 존경하고는 있었다.
그동안 매번 건강하다고 칭찬받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허물어지는 몸뚱이를 부여잡고 선생님께 조언이나 위로나 받아야지 하며 찾아 갔는데 웬걸 의사가 바뀌어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미모의 여의사로…
보아하니 대학 바로 졸업하신 분인 것 같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친절하고 사회성도 좋아 보이고 학교 때 공부 엄청 잘했을 것 같은 똑똑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찬찬히 진료했다. 반세기 건강검진이라 할 것이 많았는데 피부 짓무름을 보려는지 온몸을 스캔하고 혈압도 재고 장기를 다 들여다보는 초음파 검사까지…. 선생님은 내가 불편할까 눈치를 살피며 노련하게 이것저것 말도 시켜본다. 애가 몇 살이냐, 애들은 뭐 하느냐 기타 등등, 젊은 의사 답지 않게 말도 잘하고 수줍음도 없어 보이던 그녀와 아이들과 어떤 언어로 이야기하느냐 이런 질문이 오가다가 내가 한국 사람임을 드러내게 되었다.
내 뱃가죽에 물컹한 액체를 쏟아부으며 초음파를 기계로 내 배 위에서 그림 그리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싸랑해요 “ 했다.
적쟎이 당황했다. 웃도리 훌러덩 올리고 민망한 포즈로 누워 있는데 독일 의사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 가볍지 않은 가벼운 한 마디에. 덧붙여 그녀는 몇 마디 더했다.
“하지 마”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온갖 한국 음식 이름을 나열했다. 치맥, 떡볶이, 라면…. 넷플릭스에서 보고 있는 한드 제목들도 줄줄 나온다.
전혀 준비 안되어 있던 나는 (아니 배 까고 누운 상태에서 사랑고백과 함께 쏟아지는 의사 선생님의 한국어 애교 공격에) 양손을 앞으로 뻗어 (민망하게) 엄지 척을 해주며 잘한다고 칭찬해 드렸다.
아…. 담당의사에게 한국어로 고백받을 줄이야…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으면 클날뻔했다. 내 배에 흥건히 발라진 물컹한 액체들을 의사 선생님이 주신 휴지 조박으로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축축한 배 위로 옷을 주섬주섬 주서 입고 선생님의 데스크 앞에 앉았다.
다행이도 아는 단어를 다 발설하셨는지 더 이상의 한국어 발화는 없으셨다.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반 세기를 살아낸 내 몸뚱이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은 없는지 챙겨주신 후 존경하는 지난번 선생님께 했듯이 온몸이 쑤시고 아픔을 호소하자 한마디 잔소리 없이 관대하게 마사지 티켓(?)을 척척 발권해 주셨다. 그분께 그대로 전수받으셨나?
감사의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독일살이 20년 남짓 살다 살다 이제 한국어 하는 독일의사에게
진료도 받는구나. 무엇이 더 쇼킹한가 생각중이다. 거침없이 논문써주는 지피티? 아님 더듬 더듬 한국어 단어 말하시는 독일 의사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