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어가 무너졌다
내게 갱년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된 가장 눈에 띄는 신체적인 불편함은 앉아있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앉.아.있.기.가 힘들다니 말이냐 방귀냐.
젊었을 때는 꾸준히 수영을 했었고 나이 들어서도 동네에서 붓캠프라 하여 일주일에 한 번 야외에서 체력단련 운동을 했었는데 코로나로 모든 것을 멈추었다. 판데미 초기에는 홈트레이닝으로 전환하여 팔다리를 휘적휘적해가며 땀도 방울방울 흘리며 잘 나가는 유튜브 선생님들 강의를 열심히 따라도 해 봤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 그 동력을 상실해 버렸고 그냥 숨쉬기만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있지도 않았던 근육들이 순식간에 순지방으로 돌변하면서 마냥 물렁탱이 인간이 되어 버렸다.
오래 서 있거나 격한 운동을 하는 것이 힘든 것은 내 나이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앉아 있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앉아 있지 못한다면 사회생활을 어찌한단 말인가? 작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이 몸뚱아리의 특이 사항은 나에게 갱년기에 대해, 나이 듦에 대해 애써서 생각해 보아야 할 빌미를 제공했다.
대체 앉아 있기 힘들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거나 소파에 앉을 때조차 무작정 다리를 꼬게 된다. 먼저 왼쪽다리를 꼬아 앉다가 조금 지나면 오른 다리를 꼬아 올리고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똑바로 앉지 못한다. 이는 몸통 코어만의 힘으로 앉아 있기가 힘들어져서 꼬아진 다리와 비틀린 허리에 몸의 중심을 똬리 틀어 얹은 모양새이다. 처음에는 갑자기 의자의 높이가 맞지 않아 그런가 의심하며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한 사무실용 의자에 꽤 많은 돈을 투자했다. 비싼 의자에 앉아 최적의 높이에 맞추어 바른 자세로 앉으면 무너진 자세가 살아나겠거니 했다. 물론 애써서 바른 자세로 앉으면 몸의 통증은 덜하다. 하지만 앉아 있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대체 뭔 사달인가? 뛰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어찌 힘들어질 수가 있는가?
근육은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아 유지되는데, 갱년기에 에스트로겐 수준이 쭉쭉 떨어지면 근육 소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근육 소실은 몸에서 뼈대와 근육이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즉 연체동물이 되어 어디에 몸쪼가리를 걸치지 못하고 그저 미끄덩 거리는 기분이다 (뼈만 없지 든든한 단백질 덩어리로 유연하게 움직이는 연체동물의 입장에서 내 이 비유는 매우 거슬릴 수 있겠다. 연체동물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
내 몸, 저 살 깊은 속에 꽁꽁 숨어 있는 근육들의 성장은 고사하고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마저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 갱년기인가. 에스트로겐은 근육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생성과 분해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는데 이 호르몬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있던 근육의 건강도 무너지고 그 세기와 강도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즉 아무래도 존재하지 않았던 근육이 무늬로만 남게 되고 그 세기와 강도마저도 잃게 되면서 한 올 한 올 몸을 떠나 신나게 가출을 하는 것이다.
근육이 사라짐의 느낌은 이러하다. 그냥 모든 동작이 불편해진다. 지금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목 뒤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잠시라도 집중하지 않는 순간에는 미세한 통증이 생긴다. 손마디부터 뒷목, 어깨까지 찌릿찌릿 통증이 느껴진다. 또한 몸통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꼬부랑 할머니처럼 등이 살살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휘어만 간다. 그뿐이랴, 다리를 바르게 세우고 있는 것이 불편해 자꾸만 이리저리 꼬고 싶어 진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할 때에는 자세를 신경 쓰거나 생각할 여유가 사라지는데 그러면 금세 이상한 모습으로 앉아 속절없이 몇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일그러진 얼굴, 거북이 목, 잔뜩 긴장된 어깨에 활처럼 굽은 등, 힘이 다 빠진 아랫배에 힘을 주기 위해 왼다리를 한번 걸쳤다, 오른 다리를 걸쳤다, 얼기설기 다리를 엮어가며 무게 중심을 잡으며 겨우겨우 앉아있게 된다. 아... 가엽다. 젊었을 때 에스트로겐의 힘으로 공짜로 가졌던 건강한 근육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재산이었음을 반백살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직장에서도 앉아 있기보다는 서 있는 것이 더 쉽기에 무너지는 자세로 오래 앉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서서 일한다. 강의를 하는 직업이다 보니 걸어 다니고 왔다 갔다 하면서 뒤꿈치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움직이려는 노력을 해는 보지만 일만 하기도 버거운데 도망간 근육까지 챙길 여유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퇴근 후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고 나면 그냥 소파로 진격하여 골키퍼가 슬라이딩을 하듯 온몸을 소파에 맡겨 버린다. 핸드폰도 소파에 누워서 보고, 책도 누워서 읽고, 심지어 글 쓸 때도 작은 공책을 허공에 들고 누워 메모를 한다. 헛웃음만 터지는 기이한 행동들이다. 이렇게 누워서 모든 것을 처리하다 보니 생기는 도미노 현상들도 가지가지다.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쓰다가 손목의 힘이 빠져 핸드폰이 머리통 위로 수직 하강! 아무래도 아득해져 가는 뇌는 더 비루해진다. 또 누워서 공책에 메모를 쓰자니 펜의 잉크가 아래로 몰려 써지지 않아 옆으로 비틀어 누워 쓰다가 목 삐걱, 어깨 삐걱. 책을 들고 읽다가 졸음이 와서 책 모서리에 소중한 눈을 내주기도 하는 등 가지가지로 셀프 코미디를 창출하면서 산다.
이제 이 지경이 되도록 몸을 그냥 굴리고 불평불만만 하는 시절을 간절하게 접고 싶다. 갱년기를 조각조각 해부해서 세상에 고발하고 그간 재산인 줄 몰랐던 에스트로겐 수치를 조절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고 온몸이 쑤시는 연체동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나보다 선두주자인 우리 집 아저씨는 테스토스테론의 급 강하로 인한 남자 갱년기 극복을 위해 집에서 열심히 운동한다. 그는 운동해서 근육을 만들고 나는 운동하기 싫어서 글을 쓴다. 아 정말 나라는 인간이란. 이렇게 의지가 가벼운 것만큼 몸도 가벼우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털끝 같은 의지에 육중한 몸을 가지고 기나긴 갱년기 터널을 지나야 한다.
에스트로겐이 쩍쩍 말라가는 것이 느껴지는 갱년기의 좋은 점을 애써서 찾자면 그동안 별생각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반백살의 나에게 내 몸과 그 변화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물꼬를 트여 준 것일 텐데 그것에 고마워하자니 타이핑을 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몸이 쑤셔서 불평만 나온다. 어쩔꼬.
이왕에 낙지가 될 것이면 물속에서 살아야 울라울라 수영하면서 우아하게 살터인데 먼지 풀풀 나는 지상에서 낙지가 되어가니 그냥 의자에 붙어 앉아 있기도 힘들고 눕고만 싶도다. 내 에스트로겐을 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