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
기막히게 바쁜 한 학기가 드디어 지나갔고 내 한 몸뚱이는 거북복에 둥근 어깨로 진화되면서 치아교열까지 바뀌어 극심한 치통으로 치료받으러 다니다가 드디어 고대하던 휴가를 떠나왔다. 치과 의사 선생님께 제발 스트레스를 날리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치료는 부차적인 것이라며… 젊은 의사 선생님이신데 내가 치통에 쩔쩔매며 시달리자 사뭇 흥분까지 해가시며 나를 야단치셨다. 정신관리 스트레스 관리 잘해야한다고… 틀린 말씀 아니라 숙연히 그의 가르침을 따르러 휴가를 왔다. 드디어!
1600킬로 여정. 4식구가 비행기 타고 난짝 갈만한 주머니 사정도 안되거니와 근래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아들이 굳이 운전을 해 가야겠다기에 4개국을 가로질러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 유럽인들에게는 흔한 여름휴가의 형태지만 반도에서 자란 나에게 서너 개 나라의 국경을 하루 만에 꿀떡꿀떡 넘는 행위는 독일 산지 십수 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다. 이 끈끈한 한반도 정체성!
지난 화요일 독일을 중남부를 주욱 가로질러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에서 1박을 한 후 그다음 날 바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알프스 언저리를 터널로 통과해 이태리 고속도로를 타주면서 슬로베니아 국도를 10여 킬로 타고 드디어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
서유럽의 바쁘고 빡빡한 일상을 떠나 일단 내게는 이쪽 사람들의 여유와 풋풋함이 좋다 (휴가 때만 오기 때문에 이들의 일상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일단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슬로박 언어와 유럽어들, 영어가 다 섞여 들리는 것이 커다란 평화를 준다 (독일에서도 다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지만 독일어인지는 분명히 아는데서 오는 스트래스가 만만치 않다). 알아 들어야 마땅한 언어를 못 알아듣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언어구분조차 안 되는 이곳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여기서는 “참이방인”이어도 되는구나.
물론 독일에서도 이방인이다. 그러나 독일 남편과 가정을 꾸려 한독가정 아이들을 키워내는 엄마로서 독일에서는 이방인 취급을 받더라도 동시에 책임감 있는 독일시민이어야 하는 것이 억울 답답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즉 세금은 따박 따박 내야 하지만 참정권은 없다 (물론 이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대한민국의 국적정책이기에 독일 정부에만 책임을 묻지는 못한다)
이제 2주간 이방인임을 즐기다 가려 다짐하면서 아름다운 커르크섬의 항구를 보며 항구에 대해 내게 아는 것은 무엇이며 어떠한 잔상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 보다 깜짝 놀랐다. 나는 항구에 관련된 스토리에 대해 아는 것도 기억나는 것고 없었다.
세 시간째 푸른 바다와 아기자기한 지중해의 오렌지 빛 지붕과 뾰족 뾰족 드러난 나무를 보면서도 아무런 글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 나의 빈약한 상상력. 지난 한 학기 고강도 노동으로 원래도 부족한 상상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고갈되었다.
내 이번 2주 동안 통통하게 살찌워 보련다. 상상력! 이게 갑자기 되지는 않겠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너무 시달렸던 나에게 변명거리를 주고 싶다. “항구”하면 생각나는 것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밖에 없는 얄팍한 생각들로 근근이 살아가던 가여운 무상상력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