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들에게도 왕왕 나타나는 현상
지난 2주 똘똘이 3살 조카가 놀러 와 독일에서 2주를 보냈다. 왕성하게 말을 배우고 있는 똘똘이는 들은 말을 자기 식으로, 때로는 더 수려하게 만들어 발화했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무한 기쁨을 느꼈는데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똘똘이의 입출력 사이의 간격이 눈 깜짝 찰나였다는 점이다. 조카는 방금 처음 들었을 법한 단어와 표현을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 언어 레퍼토리 속에 넣었다 빼면서 순식간에 자신만의 표현으로 바꾸어 발화했다. 그 표현은 때로는 상황에 딱 맞아서 놀라웠고, 때로는 너무 아이 같아서 귀여웠으며 때로는 동화책에 나오는 문어체라 성스러웠다. 실로 말을 배우는 어린 인간은 대단하다!
내 아이들의 한국어 습득은 (당연히) 단일언어 사용 가정 아이들에 비해 늦었었다. 아이들은 독일어 영어 한국어 세 개의 언어에 둘러싸여서 각각의 언어들을 나름 유기적으로 배워 갔겠으나 한국어를 총대 메고 담당한 한국 애미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귀엽고 더딘 한국어 발달은 종종 스트레스이기도 했었다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똘똘이 조카가 2주간 내게 보여주고 간 어린
휴먼빙이 가진 언어습득 장치의 우수함은 인류가 어찌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잠시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초단편 영화와 같았다. 그중 눈에 띄게 흥미로웠던 점은 똘똘이도 챗지피티와 같이 여러 종류로 상상의 스토리를 만들어 대화를 채운다는 점이었가. 이것저것 질문을 해보면 그것에 대답을 하기 위해 상상의
친구나 형을 소환한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똘똘이가 구사해 내는 유려한 문장을 자세히 듣고 있다 보면 근사하지만 (짧은 구간이나마) 어떤 부분들이 말이 되지 않음(논리를 떠나 정말 말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Chat GPT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나올 때 환각현상 (hallucination)을 일으키며 논리와 상관없는 멋진 답변들을 마구 제시하듯이 말이다.
사실 여러 개의 언어에 둘러싸여 언어를 배우던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현상은 있었다. 둘째 딸이 아주 어렸을 때 자기도 아빠와 이야기하고 싶은데 자꾸 큰애가 아빠와의 대화를 조금 더 발전된 (한 살 반 차이) 독일어로 독점하자 말이 될랑말랑하는 독일어로, 하지만 그 말투와 억양은 마치 어른처럼 만들어서 자신 있게 발화하면서 대화에 끼려고 해서 남편과 나를 박장 대소하게 만들었었다. 예를 들어 겨우 겨우 한 두 마디 말을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 여기 봐세요“라든지 “그런 거란 말이지…“ 하면서 그럴듯한 (자신은 뜻도 모르고 발화하는 듯한) 임팩트 있는 발화로 우리의 주위를 많이 끌었었다.
이와 같이 아직 데이터가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대화에 참여하고자 하는 동기 및 무엇인가를 출력해 내고자
하는 동기가 강해서 그럴듯하게 말을 지어내거나 상황에 맞게 스피치 톤이나 이야기를 맞추어 대화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어린아이들의 노력과 쳇 지피티의 할루시네이션은 어떤 점에서 닮았다.
노엄 촘스키 교수님이 내 글을 읽으시면 노발대발하시겠으나 어린아이의 상상대화와 쳇 지피티의 할루시내이션은 어떤 점에서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