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몸싸움의 전말

은퇴 후 재취업으로 멘붕온 독일 아저씨

by 문맹

은퇴선언 후 8개월. 남편이 재취업되었다. 힘들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애처롭다. 지난 8개월간 신나게 집에서 논 우리 집 아저씨는 지금 몹시 마음이 불안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올 초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를 선언한 남편은 혹시나 일이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오퍼가 오지 않는 날들을 즐기면서 재미나게 살아왔다. 작년 말 소위 마지막 프로젝트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끝낸 후 그가 한 말, 이제 내가 원하는 삶을 살리라.


열과 성의를 다해 응원했지만 마음속에 근심의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른 것은 사실이다. 대학에서 나오는 내 쥐꼬리 월급으로는 도저히 그동안의 남편의 재정적 공헌을 따를 수 없다. 게다가 매 끼니마다 집안 기둥뿌리가 흔들리게 먹어대는 성장가도의 정점을 달리는 자식이 둘이나 있다. (참고로 우리는 외식을 가기 전에 큰 아들을 꼭 미리 밥을 먹여서 데려간다. 그렇지 않으면 식당에서 그냥 거덜 나거나 밥 먹고 나서도 계속 배고프다 징징댄다.)

올초부터 은퇴를 선언한 울 집 아저씨는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쏠쏠히 책도 읽고 인터넷을 세상을 신나게 휘젓고 다니면서 18세가 되는 아들을 독립시키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짐과 동시에 집안일을 맡았다. 장보고 요리하고 가끔 청소도 하고. 매일 아침 발코니에 내가 심어 놓은 토마토, 파프리카, 깻잎, 맨드라미, 들꽃 들을 정성을 다해 규칙적으로 돌보아 삽시간에 이 녹색자식들도 우리 새끼 못지않게 튼튼한 장신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뭐든지 규칙적으로 하는 일에 매우 취약한 나는 식물도 딱 심기까지만 잘하고 돌보는 데는 전혀 재능이 없어서 깜빡 잊고 물 주는 것을 잊어 말려 죽이거나, 흙이 모자라 갤갤데는 작은 생명들의 외침을 잘 못 듣는데 남편은 귀찮아하는 기색 한 번 보이지 않고 단 하루도 거름 없이 룰루랄라 발코니의 생명들을 참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돌보았다.


생명을 유지시키고 자식을 독립시키는 일은 숭고하기에 집에서 이런 일들을 기꺼이 해가며 불평 전혀 없는 남편이 기특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체 마냥 신난 저 마음은 무엇인지 의아하고 불안했다. 진정으로 나를 직업 전선에 혼자 두고 훌쩍 은퇴하려는가?


석 달째 까지만 해도 설마 설마 했었다. 힘차게 놀다가 심심하면 다시 무엇인가 일거리를 찾겠지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음을 깨끗하게 드러내 놓고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장시간 본 후 나의 마음은 차츰 내가 일을 좀 더 찾아 해 보자로 기울었다. 애들 곧 다 독립할지 언데 설마 내가 우리 부부 두 입에 풀칠도 못할까. 독일은 학비도 공짜고, 애들은 고 2부터 알바를 해왔기에 아빠가 놀더라도 지 몸 하나 보살필 수 있게 대비되어 왔다. 여러 가지 대안들을 생각해 가며 엄습한 불안감을 달래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워낙 일장군이면서 일중독인 남편은 한 번 프로젝트를 맡으면 work-life 균형은 개나 줘버리고 그냥 올인해서 일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조금만 놀다 보면 못 견디고 좀 쑤셔 바로 후회할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기 은퇴를 부르짖을 때 힘껏 응원해 주고 (잠깐이라도 쉬고 다시 시작하라고) 축하해 줬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놀면서 만들어내는 빈자리는 제법 컸고 나의 불안함은 ‘은근슬쩍’의 단계를 지나 ‘대놓고 심각’한 단계로 훌쩍 넘어섰다. 한술 더 떠서 남편은 자신이 언제 일했냐는 듯이 놀 때도 너무너무 잘 논다. 진짜 놀랬다. 나는 팔방미인과 결혼했더라!


동시에 나는 열심히 일하면 팍팍 줄어드는 은행잔고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을 강화시키면서 발버둥 치며 영혼을 갈아 일했다. 일 더 한다고 돈이 더 나오지는 않지만 왠지 열심히 일하면 덜 불안했다 -아, 이 사회가 길러낸 나의 노예근성... 지탄한다! 남편이 다 해놔서 집안일도 할 것 없겠다, 불안한 마음에 내 코를 일터에 콱 박아버렸다 - 인생의 시름을 잊어 보기 위해.

사실 남편은 3개의 프로젝트를 지원해 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독일은 워낙 사람을 뽑는 일에 신중하여 - 누가 알겠는가 신중한 것인지 뽑는 사람이 휴가 간 것인지, 아니면 돈이 없어서 못 뽑고 있는 것인지 - 경력직을 뽑거나 프로젝트 수주 결정을 하는데 오래 걸린다.


그러던 어느 날 3개의 프로젝트가 마치 서로 입을 맞추어 짠 것처럼 한 날에 연락이 왔다. 대체 우주의 진리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피를 말리면서 (물론 내 피다) 수개월을 기다리던 연락이 모두 하루에 걸려오는 것일까?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회사 A는 오늘 오후에 급하게 인터뷰를 하고 적어도 목요일부터 출근해 달라. 회사 B는 오늘 안에 마지막 내부결정이 내려지니 당장 일할 수 있게 준비해 달라. 회사 C는 이번주 안에 결정 날 테니 가방 싸고 있어라... (이것이 무리인 이유는 출근지가 각각 폴란드, 상하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장난하나- 한국처럼 유연한 직장인들한테나 가능한 요구지 독일 사람들에게 이런 급작스런 요구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3개 중에 하나의 프로젝트는 따게 될 것 같아 나는 들뜨기 시작했다. 8개월 동안, 30일 곱하기 8, 그러니까 240일간 하루도 빼지 않고 남편이랑 함께 숨 쉬며 지낸 그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쓸고 갔다. (세상에는 금슬 좋은 훌륭한 부부들이 많을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을 존경한다). 240일간의 쉼 없던 동거에 괄목할 만한 전투도 없었으니 노벨 평화 (동거?)상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다. 이 문제는 남편을 사랑하는가 안 하는가 뭐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살아가는데 내 공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고 240일간 누군가와 (생각해 보니 두 아이들까지 합쳐서 4명, 즉 누군가'들'과) 매일매일 한 공간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굳이 덧붙여 구시렁거리자면 동거인들이 출퇴근하고 학교 들락날락할 때랑 모두 한 공간에 같이 숨 쉬고 있을 때는 공기가 다르다 (올 한 해 고3이었던 아들은 3월부터 입시준비로 학교를 가지 않았다... 가엾은 어미의 한숨이 더해지는 순간).


어쨌든, 나는 앞으로 펼쳐질 나만의 공간과 세계, 그리고 이 어마무시한 경제적 부담에서 정해진 기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나고 남편에게 고마웠다. 당장 집에 초대하고 싶은 친구들의 리스트를 적었다. 남편이 출근하면 내 맘대로 대충 먹고 대충 치우고 새벽부터 일어나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오메나 너무 좋아서 가심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남편도 이제 화초에 물 주고 애들 뒷바라지 그만하고 돈 벌러 나가게 되니 새로운 세계로 다시 발을 들이기에 짜릿하고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근데 뭐람? 나가기 전부터 불평이 장대하다. 왜 자기를 다시 부르냐며... 기막혔다. 우리 집 아저씨는 진심으로 놀고 싶었나 보다.


엄살을 부릴지언정 안 나가지는 않을 테지만 이건 뭐 유치원 처음 등원하는 아이가 엄마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 마냥 일터에 가는 것에 대해 공포심을 표출해 냈다. 이해 못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도 두 아이 낳고 아이들이 큰애 세 살, 둘째 두 살이 될 때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쉼 없이 경제전선에서 싸웠기에 남의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의 의미가, 바깥에서 타인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안다. 곧 있으면 개강이라 학생들을 만나러 갈 텐데 설레기도 하지만 앞으로 뻔히 보이는 한 학기의 죽노동에 벌써 마음 한편이 싸늘해진다. 노동현장의 스트레스를 너무도 잘 알기에 나도 가볍게 일할 줄 모르는 요령 없는 인간이라 8개월 놀다가 등 떠밀려 출격하는 남편의 공포심을 느낄 수는 있었다.


어찌 되었든 8 개월의 꿈같은 잠정적 은퇴 시간을 만끽하던 우리 집 아저씨는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첫 출장을 갔다. 그리고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재수가 옴 붙어서 첫 두 주간 준비 안된 사측의 실수로 겪지 않아도 되는 너무 많은 난관을 겪게 되었다. 여러 가지 기막힌 에피소드 끝에 마지막은 일주일 간의 일을 마치고 출장지에서 돌아오는 항공편의 급작스런 취소로 그날 집에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이 제로가 되자 공항 내에서 이 비행사 저 비행사 서비스 데스크에 전화해 사정 사정해서 결국 폴란드에서 독일로 바로 들아오지 못하고 코펜하겐을 경유해서 빙빙 돌아 집에 녹초가 돼서 들어왔다.


게다가 자주 가야 하는 출장지 중 한 곳은 우크라이나 접경 폴란드 지역이라 이용해야 하는 공항 역시 나토(NATO) 영토의 최동단으로 공항에서 미사일 받침대만 수십 개에 주악 깔려있던 전투기도 보았단다. 일해야 하는 공포 위에 혹시 모를 세계대전의 공포까지 눈으로 보아가며 임시은퇴를 철퇴해야 했으니 속이 말이 아닐지어다. 그렇게 폭풍우 몰아치는 첫 2주를 보낸 후 초죽음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주말 내내 업무파악하느라 수백 장의 보고서를 읽고 비자발적 재취업으로 인한 세무사, 보험회사 기타 등등에 신고 서류들을 작성하느라 토요일 일요일을 끙끙대더니 드디어 감기기운이 올라 시름시름 앓기까지 한다.

불편한 도전이 다시 시작되면서 가족에 대한 책임이 모조리 다 본인의 어깨 위로 옮겨진 가엾은 당나귀… 안쓰러우면서도 왠지 마음이 놓인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마음도 몸도 불편한 남편은 산더미 같은 일을 끝내자 다시 한참을 보채고 징징댄다. 어쩌다 자기가 다시 일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나는 이 불평이 노랫소리로 들리니 어찌할쑤까... 내가 별 반응이 없으니, 내 학위의 반은 자기 것이라고 으시될 때는 언제고 (나는 우리 아이들의 ‘어쩔 수 없는’ 3개 국어 습득에 대한 논문을 써서 학위를 땄다) 나보고 박사학위를 가진 베이비시터라 놀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 남편이 나를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레퍼토리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1도 빈정 상하지 않았으며 다음 주에도 곱게 출장 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 또 덤비길 대학에 안주하지 않고 업계에서 일했으면 자기는 은퇴할 수 있었을 꺼라며 고학력자들을 저임금으로 부려먹다고 대학까지 욕한다. 내가 대학 마크 뒤에 숨었다나 어쨌다나 ㅎㅎㅎ 하루종일 자신이 다시 일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일 때마다 길길이 날뛰었다.


이럴 때 한 방의 펀치가 필요하다. 이해는 십분 가지만 내버려 두면 선을 넘게 되고 하면 안 되는 말을 입밖으로 내다가 전쟁이 시작될 수가 있다. 그래서 잠시 무력을 사용해야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는 명약이다. 그리하여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K 여인의 호연지기를 장착하여 남편에게 달려들어 엉덩이를 발로 뻥 차주고 등짝 스매싱을 날려주었다. 조용해질 줄 알았더니 따라와서 나를 깔아뭉개고 누워 올라타서 계속 불평이 쏟아진다. 그때 느꼈다. 아~~~ 남편이 정말 많이 힘들구나... 꼬옥 끌어안고 가엾은 마음과 동시에 매를 벌었으므로 남편의 커다란 등짝을 격려인지 맴매인지 가늠하기 힘들도록 미세하게 세기를 조절하며 수십대 두드려줬다. 조금씩 맞아가면서 남편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는 선을 넘을랑 말랑 하는 무력을 사용하면서 남편에게 가장의 무게를 덤터기 씌우는 의식을 마쳤다.


이 격려와 호통 사이의 몸싸움이 많이 거슬렸는지 절대로 방 안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 고 3 딸아이가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빠 징징거리는 소리, 플러스 엄마 등짝 스메싱과 웃는 소리에 시험공부 방해 된다고!


딸의 이 한마디는 나의 모든 현란한 달래기(?)및 채찍을 겸비한 스킬보다 강력했다. 남편은 풀이죽어 숙연히 자신의 오피스로 들어가 다시 클릭클릭 해가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 엄살 아닌 엄살은 고맙게도 완벽하게 수그러들었다.


일이 마무리가 된 후 나는 조용히 딸 방에 들어가 혹시 드시고 싶은 것은 없는지, 가지고 싶으신 것은 없는지 꼼꼼히 챙겼다. 앞으로도 남편으로 인한 나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한 방에 해결해 줄 구세주를 올바로 대접하고 숭배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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