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독일아저씨 교양인 만들기
한차례 여름이 지나면서 휴가철은 지났지만 여기 독일 중부는 이번주 내내 30도를 웃돌며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서 햇빛이 매섭게 내리 꽂힌다. 아구 더워라... 에어컨도 없는데.
지난여름휴가들을 어디에서 보냈었나 생각하다 보니 요 몇 년 독일에서의 휴가, 또는 독일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휴가지를 계속 피해왔었다. 일단 남편은 휴가지에서 독일어가 들리는 것을 싫어한다. 비행을 해야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독일 중부에 사는 우리는 한두 시간만 차를 몰면 금세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로 갈 수 있고 뱅기 값 절약을 위해 하루만 꾹 참고 운전하면 11개의 다른 나라에 도달해서 다른 언어에 노출되면서 절로 휴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언어가 안 통하는 것은 불편하기는 하지만 우리 집 독일 아저씨는 굳이 휴가까지 가서 왜, 또! 독일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하냐고 구시렁 거리며 제발 멀리멀리 떠나자고 나를 조른다.
남편의 바람을 성사시켜 주기 위해 멀리 어디로 가야 하나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사실 대륙을 바꾸지 않는 한 갈만한 관광지는 없다. 여름에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곳에서 독일어를 안 듣고 독일인을 못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수영하기 최고인 스페인의 마요카 섬, 이비자 섬 등 독일 사람들이 계절과 트렌드에 따라 힙하다고 마케팅해서 만들어 놓은 관광지에 가면 여기가 스페인인지 독일인지... 가는 곳곳마다 독일어로 도배되어 있고 언어장벽도 전혀 없다. 호텔 직원에서부터 주변 레스토랑, 심지어 전통시장 할머니까지 웬만한 독일어는 문제없이 구사한다. 매우 편리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지만 아름답고 편리한 만큼 그에 못지않은 (고통이라 여기면) 고통도 맞닥뜨려야 한다.
수영장 썬베드에 누워 조용히 쉬면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으려 하면 현란한 독일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외침 (수영장에 뛰어들지 마라, 선크림을 바르고 물에 들어가라, 골고루 발라라, 어느 부분이 덜 발라졌다 등등), 가끔은 전화통화 하는 소리, 오늘 하루 어찌 보낼지 계획하는 친구, 연인, 부부... 심지어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사람들까지... 오롯이 내 시간을 가지고 싶어 휴가를 떠나 남의 집 걱정과 집집마다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가 까지 다 들어야 하는 것은 뭐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게다가 이 시간과 장소에 꽤 많은 비용을 들였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독일어 스위치를 빨리 끌 수 있는 나는 좀 시끄럽더라도 집중해서 책을 읽거나 심지어 그 시장통 가운데서 쿨쿨 낮잠도 잘 자지만 남편은 아무리 귀를 닫고 싶어도 닫기 힘들다고 불평을 한다.
한 번은 여름휴가마다 어딜 가던지 들리는 독일어와 독일 관광객을 피하고 싶다 징징대는 남편을 위해 발리로 휴가를 떠났었다. 그런데 내가 고른 가성비 좋은 발리의 리조트는 도착해 보니 한국 관광객들이 왕창 오는 호텔이었다. 수영장 썬베드에 누웠을 때에 옆에 누울 사람이 발리 사람일 것이라 상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호텔은 그냥 한국!이었다. 남편이 늘 불평했던 소리 지르는 부모들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식당에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음식 흘리고 넘어지고, 핸드폰 카톡 알람소리에 영상통화 하는 소리까지... 아... 이 모든 것이 한국어로 들리니 갑자기 훅 들어오는 자극이 어마하게 커 졌다. 독일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으면서 내 마음대로 자극을 조절하며 살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들리고 보이는 조절 불가능한 세상에서 이름하야 휴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랜만의 일이라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진장 피곤했다. 세상의 스위치를 끄고 조용하게 지내려 '돈 내고' 찾아온 곳에서 나의 모든 원초적 감각의 기억이 서서히가 아닌
홱가닥 하고 깨어나면서 남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쏙쏙 박혀 꽂힌다. 오호통재라. 한편 남편은 평안한 얼굴로 아무것도 못 알아들으니 한국어가 음악소리로 들리고 한국 사람들을 보는 것이 티브이를 보면서 명상을 하는 것 같다며 나를 놀린다. 유럽 휴양지에서 내가 그랬듯이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여유롭고 얄미운 미소를 날린다. 왕짜증.
이런 이유로 우리는 휴가지를 고를 때에 애써서 못 알아듣는 언어가 쓰이는 지역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해외 관광지 어디를 가도 한국사람과 독일사람이 잘 가는 곳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이제 호텔을 잡기보다는 에어비엔비나 아무도 가지 않는 고립된 지역을 찾아간다. 물이 깊어서 수영하기 불편하고, 편의 시설이 거의 없어서 장 보러 가려면 다른 도시로 나가야 하는... 말 그대로 오지탐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휴가가 이렇게 오지탐험이 되기에 또 하나의 더 큰 이유는 절대로 참을 수 없는 독일 사람들의 수영장 썬배드 자리싸움 문화 때문이다.
독일사람들이 많은 호텔에 가면 아침 7시 기상하자마자 조식 전부터 수영장에 나가 미리 썬배드를 맡아두려 경쟁이 대단하다. 그 시간부터 수영장 썬배드에 눕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일단 수영장으로 가 썬배드에 수건을 덮어 씌워 이 자리는 내 자리임을 표시해 놓아야 직성들이 풀린다. 그리고는 썬배드에 딸린 작은 탁상 테이블도 차지하기 위해 그 위에 책, 선크림 등의 물건들을 놓아두고 마지막으로 썬배드 위에 펼칠 썬스크린용 우산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파라솔이 호텔투숙객 명수대로 비치되어 있지 않기에) 펼쳐 둔 후 조식을 하러 간다.
해를 피하는 동양 사람들과는 달리 양인들은 여름휴가에 해에 잘 구워져 고운 브라운 빛깔의 피부를 갖게 되는 것이 로망이기에 수영장이나 바닷가의 좋은 자리에 썬베드를 맡는 것이 중요하다. 여담인데 그들은 아무리 원해도 예쁜 브라운 빛깔의 피부로 태우기가 쉽지 않다. 잘 타게 만들어주는 테닝 크림의 힘을 얻지 않으면 벌겋게 핑크 빛으로 타기 일쑤다. 이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여름마다 자랑스럽게 나의 살들을 태운다. 잘 그을린 얼굴은 여름휴가 갈만한 재정 상태를 가졌다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며 해가 안 나서 늘 비타민 D가 부족한 독일인들에게는 건강의 상징이기도 하다. 코카시안 유러피안들과 다르게 그냥 하루 이틀만 해에 노출되어도 바로 갈색 브라우니가 되는 나를 남편은 엄청 부러워한다 (하. 지. 만 이렇게 대책 없이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하고 인천공항에 내리면 나의 조국에서는 특히 우리 엄마부터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왜 그렇게 탔느냐, 얼굴에 후춧가루 뿌렸냐... 울어머니 왈, 예쁘게 나아 주지도 않았는데 대체 뭘 믿고 피부를 그렇게 시커멓게 태웠냐까지.) 아... 이 이중정체성의 피곤함이란.
어찌 되었든 이 독일인들의 썬베드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처절하고, 이 독특한 행위, 즉 휴가지에서 좋은 자리의 썬배드를 차지하려는 경쟁행위는 다른 유럽인들에게 조차 공개적으로 놀림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지만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인터넷에 보면 심지어 '썬배드 올림픽'이라는 영상도 있는데 내용은 휴가철에 조식 전 수영장에 나가 투숙객들이 썬배드를 차지하고자 난리인데 결국 금메달은 독일인들이 싹쓸이한다는 내용이다. 원래는 호텔 측 CCTV에 잡힌 투숙객들의 모습 위에 누군가가 코믹하게 설명을 입혀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다. 조식 전에 일찌감치 나와 조직적으로 썬배드를 차지하는 독일인, 그 뒤를 따르는 러시아인, 처음 유럽 휴가 와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썬배드를 모두 놓치는 미국인 등 유쾌하고 재미있게 설명이 입혀져 있다 (그러나 직접 그 자리에 있으면 이 상황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영국의 엔터테인먼트 성향이 강한 신문에는 이것을 뒤늦게 배운 영국인들이 독일인을 앞서게 되었다는 내용들이 여름마다 단골로 소개된다. 유럽 휴가지에서 다른 민족들에 비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먹고 말썽 부리는 영국인조차도 이점에서는 독일 사람들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다가 요새 각성해서 독일인을 앞서게 되었다, 뭐 이런 내용의 코믹 기사들이다.
이렇게 조식 전부터 수건으로 썬배드를 차지하는 행동을 싫어하는 쿨한 독일 사람들도 물론 있겠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들과 휴가를 같이 보내기 싫어하는 우리 집 아저씨조차도 어쩌다 독일인이 많은 호텔에 가면 조식부터 불안해한다. 어서 밥 먹고 수영장에 나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싫지만 또 한편으로 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한숨~~~). 이타적이고(? 적어도 이 점에서만은), 휴가까지 가서 아침에 눈꼽 때자마자 남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은 나는 남편을 타이르고 야단친다. 천천히 밥 먹고 썬배드 자리 없으면 그냥 물놀이만 하자고. 알았다고 말해 놓고 남편은 평소보다 3배속으로 조식을 해치운 후 혼자서 수영장으로 직진해 나와 자신의 썬배드를 기어코 맡아 놓는다. 물론 나도 그렇게 유치 찬란하게 쟁취한 썬배드 덕에 좋은 자리에서 하루종일 독서를 하는 쾌재를 누릴 수 있다. 칭찬을 해야 하나 부끄러워해야 하나 계속 헛갈린다.
사실 이 문화에 스트레스받는 이유가 남편이 유난 떨어서만은 아니다. 아침 조식부터 시작해서 수영장에 가는 그때까지 이 사람들의 눈치 싸움은 계속되고 한 사람이 내려가 온 가족 4-5인의 썬배드까지 다 맡아 놓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서로 눈싸움하며 자리를 맡아 놓고는 정작 썬배드에 눕는 시간은 한두 시간 이상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아... 나는 그냥 아침댓바람부터 벌어지는 수건전쟁에 끼기 싫다. 원래 전투력도 약한 데다가 휴가까지 와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싶지는 않다. 이타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원래 이런 경쟁구도에 매우 취약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을 보낸다;)
한 번은 제주에 있는 호텔에서 묵었는데 거기서는 호화스럽게 생긴 썬배드(? 썬배드라 하기엔 거의 호텔룸 수준으로 차려진 공간)를 돈 주고 빌리도록 되어 있었다. 공짜인 썬배드는 작열하는 태양아래 여러 개가 있었는데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늘 공짜였던 공간을 위해 돈을 내려니 속이 쓰리긴 했지만 내가 제일 스트레스 받는 일이 이렇게 라도 해결되니 깔끔해서 좋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내고 썬배드를 빌렸었나? 아니다. 돈 아까워서 썬배드 없이 수영장에서 신나게 수영만 하고 놀았다. 나는 썬배드를 차지하려 유난 떠는 남편을 보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투숙객들은 정해진 시간만 썬배드를 사용하고 바로바로 반납하고 다른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자주 비워지는 것을 보니 속이 후련했다.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는 습관은 나쁘지만 공짜가 아니기에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게 되는 것을 보니 때로는 시스템이 사람의 행동을 이렇게라도 관리해야 함을 느끼며 약간 슬퍼진다.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시하여 사람은 항상 이타적인 동물이 아니기에...
울집 아저씨를 썬배드 전쟁에서 구하는 길은 뜨거운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같은 동족들이 잘 가지 않는 호텔로 휴가를 가거나, 아니면 오지로 휴가 가는 길 밖에 없는 것 같다. 험한 길을 걸으며 오늘도 이 덕국 아저씨를 교양인의 길로 이끌고 있다. 화이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