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uth about God
2022년 1월, 횃불트리니티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 기간동안 예배설교동아리인 예설동에서 윌리엄 윌리몬의 책을 연속으로 읽고 있다. 1월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루는 세례와 성천에 대한 두권의 책을 읽었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윌리몬이 하우어워스와 함께 쓴 [십계명]을 읽고 있다. 앞선 두권의 책은 윌리몬의 따듯한 감성과 위트가 넘치는 필치가 느껴졌다면, 이 책은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급진적인 느낌이 강하다. 얇은 책이지만, 번역의 문제도 있어서 읽기에 수월치는 않다. 그래도 집중해서 읽다보면, 기존의 십계명에 대한 생각은 풀어헤쳐지고, 수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십계명이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한 요구를 말하고 있음을 깨달아가게 된다.
서문과 들어가는 글에서는 글을 쓴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그분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고백을 하는 우리는 "서로 참된게 말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며, 우리의 실천은 믿음과 동떨어질 수 없다. 십계명을 안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고백만큼이나 중요한 중요한 실천 항목들을 평생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배우는 방법이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또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거룩한 백성이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인 한 가정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우리의 말과 소유와 성 생활과 같은 일상의 삶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삶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십계명은 인류 전체에 준 계명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것이며, 현세의 문화에 대항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인 'The Truth about God'이 내포한대로, 십계명은 타락한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일에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창조주이시요,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방편을 주셨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시고 어둠에 빛을 비추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신다.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할때마다 우리의 순종은 예배라 불린다. 우리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는 직장은 제단이 되며, 우리는 세상의 제사장이 된다. 십계명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방식과 뜻으로 전향시킨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삶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
1계명 :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우리는 계명, 율법에 거부감을 가진다.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저자들은 자유의 개념을 다시 정의한다. 자유에 대한 문제는 외부의 명령을 받으며 살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명령을 받으며 살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이집트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거짓주인이 참된 주인인 하나님으로 교체되는 사건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든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이집트에서는 그들의 주인이 파라오였다면, 지금 우리의 주인은 물질, 욕망이다. 참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킬수록 우리의 잘못된 욕망에 질서가 잡히고 생기를 되찾으면서 참 자유를 얻게 된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 만을 원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영혼, 접시와 냄비, 그 모든 정황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찾아오셔서 시간을 초월해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택하시기 위해 엄청난 모험을 하셨고, 위험을 감당하셨고, 십자가 죽음까지도 불사하셨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는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지금도... 하지만 하나님은 아내에게 애정을 가진 남편처럼 질투하시며, 현실로 침투해오신다.
우리가예배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전향시킬 때에만 우리를 위협하는 우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기도는 우상 숭배에 맞서는 행위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창조주에게 합당한 것을 드리며, 우리의 존재를 기쁨이라 고백하며,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2계명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이스라엘의 집에 입양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백성이 되는 특권을 받았다. 예수님은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령의 이어진 사역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다. 2계명그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계명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며, 어떤 행동 양식을 드러내야 하는지 말한다. 십계명의 윤리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가 되어 이 세상에 침투하셨으니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를 계속해서 일깨운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행위를 엄격하게 구분해서는 안된다. 존재와 행위는 쌍방향 길이기 때문이다.
3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은 창조사역의 목표다. 이는 온세상을 위한 것이기때문에 동물들과 이방인까지도 안식일을 즐겨야한다.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데서 오는 기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한 일, 일의 목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십계명이 단순히 도덕에 대한 것일 뿐아니라 사물의 존재방식에 관한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이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알기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서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고 비폭력적으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보인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삶을 살아야한다. 우리의 삶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존재케하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누리게 되는 쉼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심히 좋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시간을 성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시간안에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부여하신다. 기독교의 안식일은 노예해방기념일이다. 이날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급진적이며 현세의 문화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체를 확연히 드러내는 날이다. 우리는 일하지 않음으로 분주하며, 시간에 노예가 된 세상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상의 시간을 가져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변모시킨다
4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
배꼽만큼 우리를 존재론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다. 바로 이것이 4계명에서 가르치는 바다. 십계명은 인간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생명이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지음받은 것은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다. 태어나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 생존할 힘이 없는 우리가 부모에게 의지할때 생명은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아퀴나스가 말했듯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처음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추구하고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보살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존을 위해 다른 이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는 부모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처음으로 알게 된다. 또한 이 계명은 부모들에게 부모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하나님에게서 발견학 일깨워 준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생명을 부여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선물과 책임이라는 연결망에 우리의 삶이 놓여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5계명 : 살인하지 말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훔치는 일은 위험한 행위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있다. 성경에 의하면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만이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기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길이 아닌 세상을 이기는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폭력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에게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게 된다.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만이라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죽이지 않기로 한다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 즉 살인을 행하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쉽게 상처받으며 의존하는 존재인지를 배운다. 우리가 비폭력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친구이며, 또한 하나님의 친구가 될 이들이 필요하다. 이른바 교회라는 친구들이다. 5계명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에게 탐욕과 부의 축적같이 폭력을 야기하는 행위들은 회의의 대상이 된다.
6계명 : 간음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기혼자든 미혼자든 순결을 다지키라는 부름을 받는다. 외적 행위 뿐 아니라 온갖 부류의 원인과 동기, 수단도 금지된다. 하나님이 간음 금지 계명을 십계명에 포함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결혼 생활을 얼마나 소중히 말하는 것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모든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과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성실함을 어느정도 드러낼 기회를 갖는다. 사람들은 성이 개인적이며 사적인것이라는 생각에 길들여져왔다.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성은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때보다 기혼일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다. 사랑은 결혼의 열매이자 신실한 마음으로 배우자를 섬기는 것에서 비롯되는 결과이지 그 원인은 아니다. 결혼,이혼, 재혼은 공동체의 관점으로 봐야한다. 개인의 양심에 맡길것이 아니다. 결혼은 교회 전체의 일이다. 6계명은 평범한 이들로 하여금 평생 부부간의 정절을 지킨 비범한 성자가 되라는 은혜로운 초대다.
7계명 : 도둑질하지 말라
기독교 전통에서는 우리가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사는 피조물임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소유는 무엇이든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재물은 모두의 소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의 재물은 어느 것이든 더 큰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아퀴나스는 지불해야할 임금을 체불하는 것도 도둑질이요. 물건을 사고팔때 어떤 형태로든 속임수를 쓴느 것도 도둑질이다. 우리 중 대다수의 부자가 부자가 되기위해 노력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거나 우리 자신이 부자가 될만했다고 말하지, 도둑질에 토대를 둔 제도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이 어떻게 우리를 망가트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부자들의 탐욕은 끝이 없고 그들은 만족을 모른다. 재물이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요컨대 부자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세계에서 평안을 누리는 법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크리소스톰은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우리의 물건을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서 도둑질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물건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다. 재물을 소유하되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절제좌 정의의 미덕이 빼앗기지 않는 최고의 방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재물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절제와 '이웃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그들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정의 추구야말로 우리가 도둑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방편이다.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그러한 미덕이 있어야한다. 주기도에서 우리는 일용한 양식을 간청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8계명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칼뱅은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말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통해 훈련되지 않을 때, 서로 진실을 말하도록 지음받은 우리의 삶이 왜곡된다는 사실을 일꺠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이웃과 교제를 나누도록 지음받았다. 교제를 나눌 때 서로 진실하게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신다. 진리는 증언이며, 우리가 증언하는 대상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가능하게 하신 것을 증언하기 부끄러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밝히 드러났음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서로 진실을 말하라는 계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을 위한 삶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진실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보게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삶의 단순함을 터득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다. 진실한 말은 진실한 삶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진실함이라는 미덕은 삶의 방식뿐아니라 말의 내용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순교자 martyr는 헬라어로 증인을 의미한다.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잘 것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진실하게 살아내면 거짓을 일삼는 이 세상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진실하게 말하는 법을 알되, 그 진실을 자신을 치장하는 무기로 오용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진리는 승리하고 만다. 진리는 아름다움을 통해 큰 승리를 거둔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세상의 순전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진리로 이끄신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우리가 마땅히 진리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렴 우리가 진실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9/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 우리의 욕망의 대상인 마음의 관심사에도 관심을 두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셔기에 우리가 주님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십계명의 핵심을 이룬다. 하나님은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그분을 더욱 흠모하고 더욱 갈망하도록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탐욕은 질환이 아니라 죄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탐욕을 야망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일로 부르는 법을 터특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탐욕을 출세하는 것으로 부르는 법을 터득했다. 우리는 탐욕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부르는 법을 터득했다. 우리는 탐욕을 쾌락이라 부르는 법을 터득했다.
성도의 교제란 제로섬 게임이 없는 공동체를 가리킨다. 각 사람의 은사가 합쳐져 온전한 공동체가 된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이 그러한 공동체의 지체가 되었다고 믿는다. 주일은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는 리허설이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희생제물이 될때 가장 생생하게 드러난다. 주일예배에서 우리에게 가장 의미있는 순간 중 하나는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 제단 앞으로 나온 우리에게 교회가 손을 내밀어 성찬을 받으라고 말할 때다. 제단 앞에서 손을 내밀 때, 우리는 가진 것 없이 열린 마음으로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굶주린 사람이 된다. 교회는 다른 것을 꽉 부여잡고 움켜 쥐었던 우리들을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우리의 욕망은 높은 차원으로 변화되어 우리의 삶은 주린 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